▲ 일제수난하의 대종사. 일경의 감시와 억압에도 그들을 포용하고 감화시켰다.
중앙총부 창립의 초석

소태산대종사는 영산과 변산에서 교단창립의 기틀을 마련하고 드디어 익산에 교화의 전진 기지를 세웠다. 그동안 '저축조합'과 '기성조합'이라는 조직체계를 넘어'불법연구회'라는 임시교명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됐다. 원기9년(1924) 3월에 소태산은 전음광의 집에서 서중안 등 7인과 함께 불법연구회 창립을 준비하며 총부기지 입지 조건에 있어서는 생활과 교통의 편리함 그리고 넓은 토지가 있는 곳을 논의 하여 익산으로 확정한 것이다.

본 회 발기인은 서중안, 송만경, 이청춘, 이춘풍, 문정규, 박원석, 전음광 등이며, 시기는 동년 4월29일이다. 장소는 이리 보광사이며, 당시 함께한 사람들은 영광지방, 김제지방, 익산지방 등에서 대표와 신도들이 참여한 130명(남자 약60명 여자 약70명)이다. 전무출신은 수 십명에 달하였다. 동년 8월에는 신룡리에 그 터를 확정하여 서중안이 출연한 기지 대금과 각처회원들의 도움으로 11월에 비로소 현 본원실을 준공하였다.

전무출신의 생활과 교단 체제구축

원기9년 5월에 대종사 진안 만덕산에 가서 한 달 동안 선을 나며 김대거를 만나고 이듬해 3월에 새 교법을 지도 훈련하기 위하여 정기·상시훈련법을 제정 발표했다. 이 훈련과정에 의하여 첫 정기훈련은 일반 선원의 공부를 위한 중요한 기간이 될 뿐 아니라 초창기 전무출신을 양성하는 유일한 교육과정으로 가치가 있다.

익산에서 10여명의 전무출신들이 생활 방로를 모색하던 중 송적벽, 문정규, 김광선 등의 발의로 원기9년 12월 경에는 엿을 만들어 황등, 이리 노상과 촌락 부근에서 종일토록 행상을 하고 그 날 그 날의 호구를 하게 되었다. 저녁에는 모여 하루 경과보고 후 감상처리와 토의하며 대종사는 간단히 법설을 하고 공부길을 지도하는 등 공동체 생활에 돌입했다. 일 년 후 외경 접촉으로 공부에 저해 하여, 엿 제조판매업을 마치고 농업중심의 생산 활동과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공회당을 신축하여 선원훈련장을 마련하고 교단의 체제를 형성해 갔다.

법위등급 및 산업·육영 창립

원기10년(1925)에는 학력고시법을 발표하여 공부인들의 수양 연구 취사의 공부수준을 조사하였다. 각 과목 안에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의 5개 반(班)을 두었다.

그 당시 법위등급은 보통부·특신부·법마상전부·법강항마부·출가부·대각여래부 등 여섯단계의 부를 두고, 그 중간에 각 예비부를 두어 정식 부로의 승급을 준비케 했다. 승급 조항의 조사 기간은 만 3개년씩으로 하고, 승급 때에는 승급 증서의 수여와 승급 의식의 거행으로 공부인 개인의 진급과 회상발전의 영광을 축하하도록 했다.

사업고시법으로 11개 과목(창립요론)을 두었고(교단품 34장 참고), 매회 12년 기념 때에나, 유공인이 열반한 때에 이 조항들로써 축조 심사하여 회상 창립에 관한 모든 성적 등급을 정하기로 했다.

원기12년(1927)에 송만경의 제안으로 산업부 창립단을 조직하고, 그 해에 송도성의 제안으로 육영부 창립단을 조직했다. 이듬해 원기13년(1928)에는 각각 기성창립연합단으로 발전, 두 기관의 창립을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다. 원기13년(1928) 3월26일, 제1대 제1회 기념일에 정기총회를 겸했다. 총회는 12년간의 사업 보고·역사 보고를 마친 후, 2대 회장에 조송광을 선정하고, 각급 임원을 선임했으며, 산업부 창립단과 육영부 창립단의 상황 보고 후 폐회 했다. 27일에는 대종사 주재 아래 제1회 사업 성적표 수여식을 거행했다.

1회 12년과 원불교 미래창조의 저력

원불교는 교조 소태산을 중심으로 영산과 변산을 거쳐 익산 전법성지에서 총부를 건설하고 1회 12년을 맞이하는 동안 교화를 펼치기 위한 각종 체제를 구축했다. 교조가 직접 제정한 교법을 누가 어떻게 실천하도록 할 것인지가 가장 큰 화두였다. 다음으로는 어떠한 규정으로 의무와 책임을 다하도록 할 것인가였다. 교화의 주체자와 그가 갖춰야할 원불교 종교 지도자로써의 자격 기준 등이다. 이는 소태산이 바라 본 원불교의 점진적 발전을 위한 교단관과 전무출신상 그리고 교화의 대상을 생각하면서 구축한 저력인 것이다.

일제하에서 우리회상에 대한 감시가 삼엄했던 시기에서도, 위와 같은 소태산이 제창한 정신개벽의 외침이 원불교의 전법성지인 익산 총부에서 신앙 수행의 공동체를 구축하고 초기 12년의 역사를 쌓아오게 됐다. 이러한 난관극복의 역사, 뛰어난 리더십, 공동체 정신을 100년 이후에 어떻게 펼쳐내야 할 것인가? 재가·출가 전 교도가 함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난관의 역사 속에서 미래창조의 저력을 세운 소태산의 위력을 오늘날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교화연구소 /100년 총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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