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공부를 표준으로

출가의 길로 나선 후 소태산대종사와 선진들의 경륜을 새기며 자유자재하는 힘을 얻기 위해 정진하고, 근검절약과 이소성대의 창립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교단 발전에 공적을 나툰 오타원 임선양(悟陀圓 林善揚, 1923~2013) 대봉도.

원불교교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느 누구보다도 전무출신하기 좋은 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영산선원에 가게 됐고, 열네 살 무렵에 대종사를 친견했다. 처음 보는 순간 '아, 세상에 저런 분이 있을까' 하며 황홀경에 빠졌다.

대종사께서"네가 순일이 딸이냐? 입교는 했느냐"하며 그 자리에서 법명을 내려줬다. 당시 선원생들을 보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모습들이 각인이 되어 17세 때는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 청강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간 공부를 계속하자 주변에서 전무출신을 권유했다. 바라던 일이라서 두 맘 없이 서원서를 제출했다.

정산종사는 서원서를 보고 "공중사를 알뜰히 하면 천하의 주인이 된다. 천하의 주인이 되고 보면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본다. 지금의 마음을 변치말고 초지일관하라"며 용기를 줬다. 정산종사의 〈금강경〉강의와 교리해설 등을 듣는 영산에서의 생활은 늘 즐겁고 무엇을 해도 여한이 없을 듯 희망이 용솟음 쳤다.

교단의 명에 따라 정산종사는 총부로 이동하게 됐다. 이동을 앞둔 정산종사는"마음공부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니 얼마든지 자유자재할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법문을 내렸다. 그는 이 법문에 의지하여 마음을 자유자재하기 위해 평생을 정진했다.

원기28년 총부로 와 학원생으로 공부하게 됐다. 어느 날 세탁부 툇마루에 앉아 있는데 대종사께서 다가와 "너, 나를 어디서라도 보면 알아볼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예"라고 대답했는데, 5월16일 대각전에서 생사법문을 받든 것이 마지막 법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학하는 중 유일학림의 존폐문제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때 들은 정산종사의 〈정전〉강의는 평생의 자산이 됐다. 어렵게 3년 과정을 마치는 졸업식에서 정산종사는 "큰 공부는 일하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일하는 사상(事上)공부니 신성과 공심에 근원하여 부처 이루는 공부를 하고, 부처의 사업을 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 사상공부를 표준삼고 법명대로 착하게 살며 일원대도를 널리 알리리라는 각오로 교화 일선에 임했다.

원기34년 광주교당을 시작으로 익산·부산·대신·부산진·교동교당과 동산선원에서 봉직하며 근검절약과 이소성대의 창립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생활로 임하는 곳마다 교화의 초석을 튼튼히 했다. 퇴임을 앞두고는 제주교구장으로 봉직하며 선한 성품 그대로 있는 듯 없는 듯한 취사로 아낌없이 일원대도 선양에 일생을 불살랐다.

퇴임후 수도원에서는 자유자재의 힘을 얻기 위한 대정진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수도원에서 적공의 참 재미를 봤다"며 찾아오는 후진들에게 "나에게 기쁨을 주려면 하루에 30분 이상씩 선을 해야 한다"며 공부심을 진작 시켰다.

이런 정진 속에서 그는 "내생을 생각하면 희망이 양양하다"며 생사에 초연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열반을 맞이해 주위를 감동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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