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숨결 〈정전〉



의견이 분분한 내용에서 젊은 교무의 질문이 흥미로웠다.

"일원상 서원문은 소태산 스승의 서원문이라 스승도 우리 어리석은 중생에 포함하지 않습니까?" "이미 깨침과 수행을 아울러 마치셨는데 어떻게 중생이라 할 수 있을지 되묻고 싶네요."

"어리석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워서 수행심을 놓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처음엔 그 부분에 많은 고민이 되었어요. 그러나 여래의 마음엔 모자람도 더함도 없기에 수준있는 겸손이라는 상(相)을 내지도 않고 대중을 상대로 방편을 쓰지도 않습니다. 소태산께서 이미 여래가 되셨는데 어리석다는 것은 교리 체계에서도 모순입니다. 오히려 한국의 정서 속에 부모가 어리고 귀여운 자녀에게 '우리 똥 강아지'라고 하듯 아직 어려서 잘 모르지만 늘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에 대한 표현이라 여깁니다."

"깨달음에 의한 수행을 마쳤다 해서 다 완벽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덧셈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덧셈을 배우라 하지 않습니다. 물론 삶에 응용하는 데에 있어서 실수할 수도 있지요 그렇다고 덧셈을 다시 배우라고 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여래로서 서원문을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제도하는 데 응용은 늘 필요하겠지요. 마치 여래는 성리 연마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지만 의두 연마는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래가 되면 일원상 서원문이 필요없나요?" "다만 반조하는 데 필요할 따름이겠지요."

"법신불이 일원상 아닌가요?" "일원상에 대해 대중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존의 언어로 형용할 필요가 있지만 일원상의 개념이 상식으로 될 때에는 일원상 앞에 굳이 법신불을 붙이지 않아도 되겠지요. 일원상이 법신불보다 상위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논리를 넘어설 때는 움찟 놀라지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대중으로부터 교리를 가볍게 여길 빌미가 될 것 같아 염려됩니다. 사량과 지혜의 차이점이라면 뭐죠?" "상식의 기반을 넘어선 영성이 깨어나면 지혜가 되고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꼬리 무는 것을 사량이라고 봅니다. 교리공부의 상식인 중론(여러사람의 의견)에는 시간과 더불어 수행해 온 사람들의 보편적 견해가 담겼지요. 중론을 알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교리서와 법문의 흐름을 익히는 것이 우선 필요합니다. 중론에 기반하여 수행으로 내면화하다 보면 수행길이 왠지 편협하고 막힌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도그마에 빠져서 못볼 수도 있고 중론이 정치적 덫과 학문적 논리에 걸려 합리라는 명분으로 집단 관념에 걸려 옴짝달싹 못할 수도 있고요. 교리를 바라보는 지혜는 수행자가 중론을 넘어 영적 성장을 위한 자기 고민의 해결 과정과 진리에 대한 확실한 견해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수행자가 자신을 넘어서려는 영적 성장 위한

자기 고민 해결 과정에서 지혜의 꽃 피어나

<성주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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