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품 7장의 요지는 견성의 목적과 한계이다.

"견성이 무엇이냐"는 제자의 물음에 정산종사는 소동파의 시로 답했다. 〈한울안 한이치〉에서 "여산의 저녁 경치, 절강의 호수 풍경, 보지 못해서는 천 가지 한이 사라지지 않더니 얻어 보고 돌아오니, 절강의 풍경일레"라는 구절이다.

여산도 중국에서 손꼽히는 경치요, 절강의 호수도 많은 사람이 찾는 서호라는 아름다운 호수다. 그런데 견성을 묻는 질문에 왜 이런 답을 하셨을까, 아름다운 경치는 보는 사람의 눈을 시원하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그러나 하루세끼 밥을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고 인간사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속 시원하게 풀어 주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견성이란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기는 좋아도 성불에 공을 들이지 않으면 납도끼 같다고 한 것은 납도끼가 작은 나무에는 효과를 보지만 큰 나무를 자르는 데는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초발심을 뭉쳐서 간신히 납도끼 대열에 끼려는 우리들에게 벼락같은 호통으로, 작은 지혜에 머물지 않도록 법 방망이를 두들겨주는 대종사의 대자비가 느껴지는 법문이다.

대산종사는 "견성에 이르는 데 10점의 공력이 든다면, 성불에 드는 공력은 9백점의 공력이 든다"고 했다. 이는 이상의 법문들과 맥락이 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또 "공부의 시작은 최고가 자기가 요달해서 성리(性理)를 알고부터다. 그러니 성리는 꾸어서라도 하여야 할 것이요, 아무리 공부를 하였다 할지라도 성리를 모르면 어린아이요, 큰 아이지 수도인으로서 어른은 못된다"라고 밝혀 주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들이다.

예비교역자시절에 견성에 토를 못 떼고 졸업하는 것이 참으로 유감스러워 스스로 인증할만한 공부가 되지못하면 교단의 문제에 입을 열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했었다. 자기가 요달해서 성리를 알고부터 비로소 공부가 시작된다는 말씀은 성리에 토가 떨어져야 국문에 본문을 아는 것 같이 겨우 기본을 갖춘 것이란 말씀이다.

또 이 내용을 곱씹을수록 나의 분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과거에 비해 교단현실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반면 원만한 위상을 세우지 못하고 작은 지견으로 법을 가볍게 아는 풍조도 많이 생겼다.

얇은 지견으로 주장이 난무하는 것을 볼 때면 넘치는 것보다 부족한 것이 낫다는 옛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 모두는 봉사가 문고리 잡은 격인데 삼대력을 얻기 전에 소선소지에 머물러 있거나 자기주견에 걸려 회상의 맥을 놓치면 인생 100년이 허망하게 가지 않겠는가.

반면에 법에서 눈을 떼지 않게 적공하고 큰 힘 얻은 숨은 도인들이 곳곳에서 소리 없이 회상을 지키고 있음도 보인다.

그런 동지들을 볼 때 '주세회상이 역시 허명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불어 나도 어서 큰 힘을 얻어야 겠다는 성불일념의 공부심을 또 다시 챙긴다.

<기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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