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현장에 새 바람

교화일념의 열정으로 교역의 보람을 삼고 낙도생활을 한 교화자. 일생을 생사연마와 성리연마로 많은 공력을 쌓아서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임하는 곳마다 법풍을 불린 서산 이종진(誓山 李宗眞,1939~2013) 종사.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의 세계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성장했다. 화해교당 학생회와 청년회를 다니며 자신의 고뇌를 풀어보고 싶어서 이런 공부를 전문으로 하는 교무들의 삶을 알아보기 위해 원기49년 총부강습에 20여 일간 참석하기도 했다. 이런 중에도 출가의 길에 대한 선택은 쉽지 않았지만 원기51년 법산 이백철 종사의 추천으로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동산선원에서 3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원기54년 교무부 주사를 시작으로 동산선원, 공익부, 중앙훈련원등에서 봉직했다. 이후 늘 꿈꿔왔던 교화현장인 부안·남중·대전·이리교당 등에서 그 동안 연마해왔던 교화노하우를 실전에 활용하며 후진들의 사표가 됐다. 또한 교화부장겸 부원장, 원광대 법당 교감, 수위단원 등을 역임하며 교화현장의 새 바람이 되고자 헌신했다.

동산선원에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며 일원상 진리와 반야심경에 심취하여 연마한 결과 훗날 〈허공에 설화가 피다〉라는 반야심경 해설서를 펴냈다. 당시 뜻하지 않은 폐결핵을 얻어 7년간을 투병 중에 죽음과 직면하며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煩惱卽菩提 生死卽涅槃)'이 화두가 됐다. 건강상 공익부로 근무지를 옮겼다.

어느 날 대각전에서 곶감을 먹다가 한 소식을 얻어 이렇게 노래했다. '어제 덟은 감 오늘엔 단감이니, 번뇌망상 여의고 보리가 따로 없네. 생사 열반이 본래 한 몸이라 한 맘 나지 않는데 어디서 생사를 찾으리요' 이 한 소식에 천하를 얻은 듯 부러울 것이 없었다.

대각전 주위를 돌다 방에 들어가 선정에 들었는데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그대로 죽는다 해도 걸릴 것 없는 자리를 체험한 것이었다.

특히 교화현장의 첫 부임지인 부안교당에서는 법회의식 개선과 대중을 감화시키는 설교로 교화를 크게 신장 시켰고, 남중교당에서도 5년만에 교화를 100%성장시켜 익산의 중심교당으로 자리 잡게 했다.

그가 대중이 인증하는 설법의 달인이 되기까지는 미리 연마하는 정성이 숨어 있었다. 미리 원고를 작성하고 반복된 연습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또한 후진들도 세심하게 지도하여 설명기도문 하나까지도 검토하여 교화현실에 맞는 기도문이 되도록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연마와 노력으로 설교집, 교리해설서, 기도문집 등을 발행해 교화에 열정을 불사르는 후진들의 등대가 됐다.

교화부장 재직 중에는 '가고 싶은 교당 만들기'와'1인1도 운동'을 전개하여 교세확장을 꾀했고, 대각개교절을 '원불교 열린 날'로 병행 사용하게 하는 등 창의적인 생각으로 교화 발전에 정성을 다했다.

퇴임 후에는 중앙중도훈련원 교령으로 후진들에게 일원상 진리와 성리를 설하며 마지막 불꽃을 사뤘다. 병마가 찾아와 투병 중에도 후진들에게 "죽음이 모든 걸 빼앗아 간다해도 정법에 대한 믿음과 서원은 빼앗아 가지 못하고, 내가 받고 있는 현실은 내가 불러온 업보임을 알고, 무아의 대자연으로 돌아가니 이보다 더한 안락함이 어디 있겠느냐"며 생사를 초탈해 영원한 등불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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