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의 교무
미주선학대학원

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기 위해 신학자들이 노력한 것이 서양 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지성들은 인간의 행위에 벌주고 상주고 하는 절대자나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다. 프로이드는 어머니를 차지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프스 신화를 빌어 모든 신경증의 원인을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라고 보고, 거세 공포증이 만들어 낸 것이 전지전능의 신이며 종교라고 보았다.

현대 사회는 신에 대한 존재론적 측면보다 종교나 신을 믿는 개인의 심리적 차원으로 더 많이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성은 자연히 외부의 신이 있다고 믿는 종교보다는 인간의 내적 탐구에 관심을 갖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아무리 불교라도 역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고 타력이나 믿음을 강조하는 불교종파들에 대해서는 미국의 지성층들은 아주 냉담한 경향이 많다.

처음 미주선학대학원에 근무를 하게 되었을 때는 오히려 서구 지성층들의 선호하는 바대로 원불교는 과학적 사고나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호감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활동하는 내내 필자가 접하는 미국인들이 원불교도 역시 기존 종교의 틀 안에서 보려고 하였고, 그로 인해 원불교적인 종교적 특색을 나타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주선학대학원에 근무하는 원불교학과 교수진이나 교무들은 원불교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 학교에 근무하고 또한 가르침을 미국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각자의 입장에서 노심초사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은 종교적 가르침에 대해서는 그리 달갑지 않고 교당이나 학교에 와서 선수행을 하고 서로 수행담을 나누고 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 교도수가 불어나고 원불교가 발전하고 하는 것에는 그리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원불교 가르침이 현대 서구인들의 정서와 많이 상통할 것으로 보이는데 왜 그렇게 어려운지 늘 생각하고 어떻게 그 간격을 넘어서 우리의 사명을 실현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하게 된다. 원불교를 공부하고 수행에도 관심있는 미국인과 대화하면서 듣게 된 내용은 항상 가르침만 강조하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기성종교의 테두리에 너무 갇혀있다는 것이다.

사실로 우리가 보여 준 것이 그러했기 때문에 할말이 없다. 복장문제가 그랬고 동성애자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그랬고 아직도 관행적으로 남아있는 남녀차별이 그렇고….

이유야 어쨌든 우리가 머리로 추구하는 바와 달리 현재 우리가 나타내 보이고 있는 관행에서 종교적 제약들이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교법정신의 실천보다는 안이한 현실안주의 방식이 너무나 진부하게 보일 수 밖에 없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사회에서 이성적 합리적 지성들이 원불교에 호감을 가지고 감동하게 되고 정말로 다른 종교들과는 차별화된 멋진 사상과 앞으로 미래세상을 밝힐 희망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일원상 진리의 확 트인 종교사상을 드러내고 정각정행으로 기품있는 인간성을 닦고 사중지은을 깨닫고 그 보은의 대요를 실천함으로써 남녀차별과 인종주의, 혈연주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약탈과 침략으로 일그러진 인류문명사를 바꾸고자 하고,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탐욕으로 죽어가는 생명들과 파괴되는 생태계를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꿈을 어떻게 이룰까?

교단 창립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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