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출신의 사표로

공부심과 사업심을 일깨워 새 시대를 향도하는 교화정책으로 새 회상이 4대 종교의 반열에 오르는 기초를 다진 교화자. 늘 스승을 가까이 모시며 구전심수로 익힌 공부를 쳇줄 삼아 수많은 공덕주와 인재를 길러내며 전무출신의 사표가 된 법타원 김이현(法陀圓 金理玄, 1930~2013)종사.

그는 후진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아무리 바쁜 일터에서도 공부가 먼저였다. "일만하면 머슴살이와 같다"며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교리공부를 하게 했다. 아울러 공도자의 길로 인도하며 공부는 무아봉공을 하기 위한 것임을 일깨웠다. 또한 성리에 바탕한 교리강론과 법문은 듣는 이로 하여금 늘 환희용약하게 했다.

특히 주법에 대한 간절한 신성과 법다운 심법은 교단의 대의를 세우고 교단이 나아가야할 바를 안내하는 등대와도 같았다.

그는 다복한 가정환경과 활달하고 영특한 성품을 타고나 별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 원기33년 전북여자중학교(현 전주여고)를 졸업 후 봉사하는 삶에 가치를 두고 사회사업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서 총부와 교당 등에서 하숙하며 교편생활을 하던 중에 6.25를 만났다.

이것이 기회가 되어 팔타원 황정신행종사의 요청으로 제주도의 한국보육원에서 근무하게 됐으나 평소 꿈꾸어왔던 사회사업과는 많은 괴리감을 느꼈다. 또한 막연히 동경하던 사회주의도 6.25를 통해 허구임을 깨닫고 앞으로 가야할 길은 종교사업임을 자각했다.

원기37년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입학해 정식으로 전무출신의 길을 가게 됐다. 대학 3학년 때 1대 성업봉찬회의 잔무위원이 되어 구타원 이공주종사를 도왔다. 이때 구타원종사의 지도로 세속의 꼬리를 잘라내고 자신이 없어야만 올바른 전무출신이 될 수 있다는 자세를 배웠다.

이후 수학을 마치고 원기 44년 영산 제3방언공사 사무원으로 영산출장소에 발령이 났다. 대산종사를 3년간 모시며 구전심수로 배운 정전공부를 통해 비로소 출가의 의미를 깨닫고 심신출가를 하게 됐다. 교법으로 무장한 공부길을 찾고 법과 회상과 스승에 대한 관이 확립되어 영생을 이 공부로 정진하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원기48년 종로교당 교무에 임명됐다. 당시 서울은 종로와 서울교당 두 곳뿐이었다. 첫 교화지인지라 두려움과 부담감이 있었다. 대산종사는 "서울에 50개교당을 만들라"고 하명 했다. 이를 받들기 위해 원남·의정부·안양·신촌 등 힘닿는대로 연원교당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탕이 돼 원기62년 다시 종로교당에 부임했을 때는 서울의 교당과 기관이 50여개가 돼있었다.

원기67년 교화부장에 임명됐다. 유아교육기관 설립에 힘을 경주하며 어린이 교화를 위한 〈어린이 성가〉발간, 솜리어린이 잔치, 전국어린이 그림 잔치 등을 실시하고, 청소년교화를 위해 대학선방 개설과 사단법인 삼동청소년회를 법인 등록했다.

또한 한글세대를 위한 가로쓰기〈원불교교전〉을 발간하며 일선교화 지원에 힘을 기울였다. 원기73년 중앙훈련원장에 부임해서는 현재의 중앙중도훈련원을 신축해 전무출신들의 훈련터전을 마련했다.

수용품은 담박하고 매사에 준비가 철저했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성리에 표준한 무아봉공행으로 순리대로 성사되게 했으며, 머물고 간 자리마다 조용하고 깨끗한 수도자의 거룩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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