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심법으로 일관한 삶

물처럼 부드럽고 담담한 성품으로 말없는 말로 성리의 소식을 나투며, 끊임없는 정진적공으로 일원의 진리에 계합한 숨은 도인. 항상 드러내지 않고 소리 없이 이뤄내는 무위의 심법으로 순수한 대인의 풍모를 지닌 수도인 염산 이수오(念山 李修悟,1929~2013) 종사.

그는 '부처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을 던지며, '부처가 되려면 염불을 하면 된다'는 불타는 성불제중의 의지를 가지고 원기32년 입교와 동시에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원기34년 유일학림 2기로 입학하여 수학 후 서울보화원을 시작으로 동산선원, 용신·서귀포교당, 영광교구장, 이리자선원, 수계농원, 영산사무소, 원광효도마을 수양의 집 등에서 봉직했다. 주로 복지와 교화계에서 봉직하면서 언제나 올리는 기도정신으로 평상심을 유지하며 교단발전에 정성을 다했다.

특히 서울보화원에서는 수용하고 있던 보육원생들의 일부를 총부로 내려 보내 이리보화원을 설립하여 분리 수용했다. 또한 6.25로 인한 500여명에 이르는 전쟁고아들의 수용을 위해 이대부속병원과 정각사로의 이주 등에 따른 어려움이 많았지만 전쟁고아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원기45년에는 불하받아 사용하던 한남동 적산토지를 구타원 이공주 종사를 도와 재계약을 성사 시켰다. 먹을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복지현장이었지만 '이 아이들이 자라서 교단 미래의 일꾼들이 나오리라'는 신념으로 무아봉공을 실천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원기46년 제1회 서울 시민의 날 기념식에서 지역사회 발전 공로상을 수상했다.

원기58년 서귀포교당 근무시에는 교당이 어려워 호주머니에 겨우 교통비밖에 없는 삶속에서도 늘 온화한 모습으로 교당살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 하지 않았다. 이런 중에도 도순교당 출장 및 교화부 귤밭을 개간하여 조성했다.

원기62년부터는 영광교구장으로 봉직하며 지역교화의 저변확대를 위한 유치원과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연원교당 개척 등을 하며 교화의 꽂을 피웠다. 원기70년 자선원장으로 봉직시엔 직원들에게"저들을 부처님으로 모시고 정성을 다하면 자신이 부처로 변한다"며 오갈데 없는 부랑인들을 부처님으로 모시고 정성으로 보살폈다.

원기70년 퇴임을 했음에도 수계농원에 갈 사람이 없자 교단의 명에 따라 원장으로 부임해 수화불피의 정신을 후진들에게 보였다. 이곳에서도 권위를 앞세우기보다는 소똥치우기, 제초작업등에 앞장서며 일속에서 성리를 단련하기를 즐기며 영육쌍전의 모범을 보였다.

원로원에서 생활도 "무엇이든지 배울 수만 있다면 배워야 한다"며 기타를 구입해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평소에 연마한 붓글씨를 연습하면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인연을 많이 맺어야 한다"며 자선원과 가까운 복지관에서 서예를 가르쳤다.

말년에 병마와 싸울 때는 오히려 의료진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수도인다운 운심처사로 감화를 익혀 교화하는 공덕을 쌓았다. 임종을 앞두고는 동·정간 빈틈없는 적공으로 갈 때를 스스로 알고 맑고 온화한 해탈력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생사바다를 유유자적하게 건넜다.

경산종법사는 "심인을 문득 깨달아 얻어/ 닦고 닦아 억 만 번 고요하고/ 일마다 지극한 공심 나투니/ 생사는 장중의 한 구슬이로다"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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