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광대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개교반백년기념대회.
법통의 계승
제1대 3회 성업봉찬사업 당시의 교세는 의무교도 32,244명, 일반신도 290,196명, 전무출신 260여명, 교당50여 개소, 기관 18개로 큰 발전을 가져왔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사회불안 경제 궁핍 등 여러 가지 난관으로 인해 계획대로 다 추진하지 못했기에 개교반백년 계승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정산종법사는 19년 동안 재위 하고 원기46년(1961) 열반했다.

그 뒤를 이어 대산종법사가 취임했다. 그는 교서 편찬사업을 중시했다. 종법사 취임 후 바로 교서 편찬사업을 독려하여 정산종사 열반 후 9개월만인 원기47년, 원불교의 기본경전인 〈원불교교전〉이 발간됐다. 이후로 〈불조요경〉, 〈원불교예전〉, 〈원불교성가〉, 〈정산종사법어〉와 영문판 〈원불교교전〉이 차례로 발간되었다. 이는 모두 교화의 도구로 작용함은 물론, 원불교가 나아갈 내·외적 지침이 되어 교화, 교육, 자선의 발전을 위한 방향타가 되었고 인류 구원의 새 소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원불교 제2의 창립
개교반백년기념사업은 원불교 제2의 창립이라 할 만큼 의미가 깊은 사업이 되었다. 우선 교세가 양적으로 2배 이상 팽창하였고, 호남지방의 원불교에서 한국의 원불교로 점차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지도적 민족종교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종교연합운동과 해외교화에 적극 노력함으로써 세계종교로 발돋움 할 터전을 닦아가기 시작했다.

국가와 사회에서도 원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반백년기념사업은 제1대 성업봉찬사업의 연장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업추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다가오는 반백주년 정성다해 꽃피우자', '반백년 기념성업 뭉쳐서 한 맘으로', '재가·출가 합력하여 일원성업 이룩하자' 등의 표어가 제정 보급되었다.

(1)교화 삼대목표 추진운동 : 교화사업을 능률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기념사업회의 발족과 함께 교정원 교화부 주관으로 연원달기, 교화단 불리기, 연원교당 만들기 등의 세 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8만 명에 가까운 교도가 증가하였다. 교당 불리기는 교화단의 활성화를 위한 운동이 성공하여 이 기간에 약 90여개의 새 교당이 창설되었다. 이와 같이 교화 삼대목표 추진운동으로 교세가 2배 이상 확장되었다.

(2)교도 법위 향상운동 : 교화 삼대목표 추진운동이 교단의 외적 발전을 추구한 것이라면 법위 향상운동은 교단의 내적 충실을 도모한 운동이다. 대산종법사는 원기50년(1965) 10월 교도법위 향상에 관한 특별유시를 발표하였는데, 반백년기념사업을 계기로 하여 ①모든 교도가 거듭나는 기간으로 ②법의 성석(成石)이 더욱 굳어지는 기간으로 ③스승님께 보은하는 기간으로 ④바른 공부길을 잡고 적공하는 기간으로 ⑤불보살의 대법보에 올려놓는 기간으로 정하고, 천여래 만보살의 배출을 위한 대 법풍을 불러 일으키자고 촉구하였다. 또한 '공부하는 사업인, 사업하는 공부인', '천불만성(千佛萬聖)', '무등등한 대각도인 무상행의 대봉공인', '대공심(大空心) 대공심(大公心)'에 관한 법문을 자주하면서 교도들의 법위향상을 촉구하였다.

(3)각종 문화사업 : 개교반백년 기념대회 기간 중에 소태산대종사 유품 전시회, 기념사상 대강연회, 경축 예술제, 경축 체육대회, 교리 강연대회 등의 각종 문화행사가 개최되었다.

(4)건축사업 : 원기9년(1924)에 처음으로 건설을 시작한 중앙총부는 발전하는 교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그 규모를 확장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제1대 성업봉찬사업에 소태산대종사 성탑과 성비를 건립하였으나 총부를 더 확장하지는 못하였다.

서울회관건립
원기56년(1971) 10월에 착공하여 12년 만인 원기67년(1982) 10월에야 완공을 보게 된 서울회관 건립문제는 반백년기념사업 중에서도 가장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린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처음 반백년기념사업회가 발족할 때에 서울에 '청년회관'을 세우기로 계획한 것이 서울회관 건립으로까지 돌발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건립 과정에 있어서 남한강 개발주식회사에 대해 교산을 담보해준 것이 남한강회사의 부실로 교단이 빚을 짊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교단은 본의 아니게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휘말리게 되었다. 서울회관 건립문제가 경제적·법률적 난관에 부딪쳐 헤쳐 나갈 길이 매우 어렵게 되자 교단에서는 포기 내지 실패로 보기 시작했다.

대산종법사는 교단이 이처럼 큰 위기에 부딪히게 된 원인을 네 가지로 분석하였다. ①소태산대종사의 이소성대의 정신을 잘 받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②처음 일을 착수할 때와 난관을 수습해가는 과정에 있어서 교단의 중지를 충분히 종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③교단의 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과 경험축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④시국의 변동으로 경제 불황이 닥쳐와 많은 기업체들이 파산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을 교훈삼아 이후부터는 의사결정의 다원성 민주성 등을 가지는 교단으로 성숙하게 되었다.

<교화연구소 / 100년 총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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