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들에 자리한 가을을 온 몸으로 느끼는 10월. 교당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지세포 약수터로 향했다. 가는 도중 일운면 들판에 있는 억새 모습이 하도 좋아 차에서 내려 그 주변을 거닐었다. 은빛으로 물든 억새가 가는 바람에 사각 사각 소리를 내는 것이 정겨웠다. 이 억새는 매년 말이 없어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흔들림 역시 그 모습 그대로이지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복원성이 있다.

숨도 끊임없는 복원성을 가지고 있다. 숨 소리가 자연스러울 때 심신이 편안해 지는 이유다. 이때 숨이 얼마만큼 자연스러운가를 관조해 보아야 한다. 관조를 하다보면 매순간 들이쉬고 내쉬는 숨의 지속성에 감탄하게 된다.

교당에서도 수요선방을 통해 숨을 관조케 하고 있다. 교당이 숨통이 되고 숨길이 되고 숨터가 되어야 매 순간 의식 확장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대에서 거의 90대에 이르는 교도들이 함께 숨을 쉬면서 행복해 하는 것에는 뭔가가 있다. 체험 나누기 시간에 표현은 비록 서툴더라도 묘미가 있다. 마치 동심의 세계에 와 있는 듯 하다. 한 느낌에 이런 다양한 표현들이 가능할까. 몰아보면 그 말이 그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 재미있어 한다. 곧 닥칠 자신들의 체험의 세계라 더욱 그렇다. 이 느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관조의 세계는 말에 있지 않고 느낌에 있다. 그러기에 무척 소중하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 짚신세벌이면 어떠랴. 맥이 짚어진다면 숨 공부는 진척이 있다.

숨 공부를 하다보면 말 없는 가운데 흘러 나오는 몸의 노래 소리를 듣기도 하고 뻗쳐오르고 내리는 한 동작의 움직임을 직시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호흡의 연결선상에 있다.

교도들이 수요선방이 기다려진다는 것은 빈말이 아닌 듯 싶다. 일단 숨 공부를 통한 체험 나누기에 재미를 붙였으니 다른 부분에도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재미가 솔솔한 것은 당연지사다.

글로벌 인터넷 검색서비스 업체인 구글에서 명상을 지도하는 싱가포르 출신의 차드 멩 탄 역시 호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10월11일 양주 육지장사에서 진행된 특강에서 그는 호흡을 간과하지 않았다.

'하루에 한 호흡만이라도 집중하라.' '하루에 한 번씩만이라도 온 마음을 담아 숨을 쉰다면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다.' 인터넷 기사를 읽다보니 전율이 왔다. 한 숨에 삶이 갊아져 있는 것에 공감했다.

지난 8~14일에는 9차 전무출신 훈련에 참석해 숨의 흐름에 집중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행복이 따로 없었다. 훈련이 진행되는 내내 행복했다. 선 정진 시간이었는데 훈련원에서 영모묘원으로 이어지는 시대산(227.9m)을 행선하면서 숨에 집중한 것이다. 청정한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 숨인 까닭이다. 그 흐름을 놓지 않으니 몸을 잊고 행선을 한 적도 여러 번이었으니 행복했다.

그동안 숨을 쉬면서도 어떤 때는 기쁨의 시절도 있었고 어떤 때는 슬픔의 시절도 있었다. 또 다른 시절 인연으로 만날 날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행복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였다. 교당에 와서 숨에 집중하며 분수에 편안한 마음으로 살다보니 산에 가든, 들에 가든, 교당에 있든 행복했다.

<대종경> 요훈품 20장에서는 "어떠한 경계를 당하든지 분수에 편안한 사람이 제일 편안한 사람이며,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을 얻는 사람이 제일 부귀한 사람"이라고 했다.

숨 공부도 마찬가지다. 편안함과 만족을 준다. 그런다고 씨 뿌릴 생각은 물론 물줄 생각도 않고 가꿀 생각도 하지 않고 거둘려고만 한다면 방향을 잘못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실행이 우선되어야 진척이 있다.

한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 쌀을 씻어 전기 밥솥에 넣고 한동안 다른 일을 보다 아침 공양을 하려고 하니 밥솥에 쌀이 그대로 있은 적이 있었다. 취사를 누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내 취사를 누르니 네모 점선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얼마 후 밥이 됐다. 이와 마찬가지로 숨 공부도 실행이 우선돼야 몸의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교당이 숨통·숨길·숨터가 돼야
매 순간 의식확장 꾀할 수 있다


<신현교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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