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중심 분위기 되찾고, 시대적 흐름 읽어야

원기100년을 앞둔 시점에서 본사에서는 옛 것을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현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이다. 12주에 걸쳐 교단의 각 분야에서 희미해진 각종 사업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이는 창조적 계승의 측면과 미래 에너지로의 승화를 간절히 염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달에는 주무·순교의 역할찾기, 교리강습회의 변화, 입교운동, 청소년지도자 산실 꿈밭과 학생 야영대회에 대해 살펴본다.

▲ 정산종사를 모시고 열린 제8회 전주지부 교리강습회(원기35년).

교화 부흥 한 축 담당했지만
시대변화 부응 못해 약화돼


교리강습이란 재가교도 대상으로 강사를 초청해 3~5일간 교리연마 중심의 훈련을 말한다. 지금은 이러한 형식의 '교리강습회'가 대부분 사라지고 다른 형태의 훈련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교리강습회는 교단의 큰 법잔치이자 교화 부흥을 이끌어왔다.

원불교 100년 성업을 앞두고 교단적으로 다시 원불교 교화 부흥을 일으키자는 운동이 다양한 방법으로 모색되고 있다. 이에 당시 원불교 교화 중심의 한 축을 담당했던 '교리강습회'가 무엇인지 기록물에 나타난 사례를 고찰해보고 그 대안을 모색해 봤다.

교화 부흥의 역사, 교리강습회
청소년 교화 침체와 교당 교도 고령화로 원불교 교화 정체라는 말이 나오는 요즈음에 '교리강습회'가 성행했던 시절에는 말 그대로 원불교의 부흥기였다.

매년 50여 곳의 교당에서 교리강습회가 개최되었고, 참여자는 작게는 40여 명에서 많게는 600여 명일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이는 현재 왠만한 중형 교회 신자 수에 버금가는 것으로 우리에게도 한 때 이런 시절이 있었다.

현존하고 있는 공식 기록을 살펴보면 교리강습은 최초 원기23년 11월21일에 대종사 친히 설법하는 40일간 교리 훈련 실시의 교무강습회로 시작됐다. 원기31년 1월 교무강습회에 한글 학회 강사를 초청해 교육을 받아 전국 교당에 일제히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해 수강생이 도합 4천여명에 달하기도 했다.

이후 각 교당으로 교도를 대상으로 하는 교리강습회가 열리게 됐고, 원기64년 9월27~30일까지 4일동안 진행된 춘천지부 교리강습회(강사 조전권)에 6백여 명의 청중의 참석이 이뤄진 것으로 나온다. 이어 11월21일부터 3일간 교동지부는 70여 명의 청년학생들만을 위한 교리강습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교리강습회는 다양한 이벤트도 겸해 당시에는 획기적이고 최신식 행사로써 손색이 없었다. 원기65년 5월20일~23일 원남지부 청년회원 70여명을 대상으로 한 교리강습회는 마지막에 서울 교외에서 노래자랑 및 풍선게임 등의 야유회를 겸했고, 원기66년 11월에 대구교당에서 열린 이틀간 교리강습회에서는 기악발표회, 무용발표회 등 2부행사로 이뤄졌다.

원기70년 9월1일 신촌교당은 신축낙성 제1주년 기념행사로써 기도식과 함께 교리강습을 4일간 실시했다. 신축낙성식 기념이 오늘처럼 몇 시간 행사에만 머무른 것이 아닌 '교리강습회'로써 공부와 훈련까지 교도들의 내실까지 갖췄다는 기록이 인상적이다.

원기72년 7월에는 원광대학교 여자사무직원 30여명을 대상으로 3일간의 교리강습회를 열어 교리강습회가 교당 교화뿐만 아니라 교단의 전반적인 훈련 분위기로 확산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원기73년에 마령교당은 그동안 교당에서만 실시해오던 교리강습을 마을 순회 교리강습으로 방향을 전환해 각 부락의 새마을 회관에서 '교리강습회'를 열었다. 마을마다 1백여명씩 모이는 성황을 이루고 이에 따라 법회 출석수도 30여명 이상이 불어났다. 이는 교리강습회가 당시 교화 부흥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교리강습회의 성과
교리강습회가 진행됨으로 해서 교도 수가 얼마만큼 증가했는지 또 그 여파가 정확히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교리강습회가 열린 후 훈련을 받고 난 재가교도의 감상 기록물을 통해 얼마나 교화적 영향을 미쳤는지 그 열기를 가늠할 수 있다.

원기75년 삼덕교당 모 교도는 "원래 종교에 대해 무지했지만 교리강습회를 통해 원불교를 처음 알게 되었고, 강습기간 중 혼자 듣기가 아까워 주위 친구들과 집사람을 동원해서 들었다"며 "원불교는 한국이 낳은 유일무이한 진정한 종교, 주체적이고 실천할 수 있는 생활불교임을 느꼈다"고 감상을 밝혔다.

또한 교리강습회를 통해 원불교를 처음 접한 그에게 대단한 관심을 끌었던 데에는 수준있는 설교 및 교육 내용이 뒷받침 됐다. 그는 "예화가 적절하여 눈시울이 뜨거운 때가 여러 번 있었다"며 "윤회전생 인생에 있어 육체를 가진 동안만이 일생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생활인에게 인과업보의 설법은 매우 감명을 주었고, 나의 가족을 비롯해 이웃 비교도도 적극 권유하여 포교에 앞장서야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원기79년 마산교당 이대현 교도는 "30여년 신앙생활 동안 이 공부에 길들여지게 된 것은 한산 이은석 교무가 2년동안 계속해 온 교리강습의 법설로 말미암아 참다운 공부길을 찾게 되었다"는 공부담을 〈원불교신문〉에 게재한 바 있다.

교화훈련부 권도갑 교무는 "원기52년 입교당시에는 교리강습회를 일주일씩 교당에서 했는데 교당이 꽉꽉 찼다"며 "많은 불교도들이 참가하기도 했는데 원불교에 오면 교리강습을 통해 불법의 진수를 알려주니까 너무 좋은 체험이 돼 대단한 인기였다"고 회상했다.

교리강습회로 교도들의 지적욕구 충족과 차별화를 통해 많은 교화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원광대 김도종 교수는 "학생 때 교리강습을 따라다닌 적이 있었는데 집중적으로 원불교 교리에 대해 훈련시켰고 동시에 새로 입교하는 분들도 많았다"며 "당시 지역 기관장이나 면장 등이 인사도 하고 함께 밥도 먹어 지역사회 행사로써 교당이 종합적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교리강습회는 새로운 교도에게 교법에 대한 신심을 불러 일으켜서 입교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고, 기존의 교도에게는 보다 확실한 공부길을 더위 잡을 수 있도록 안내했다. 다시 말해 교리강습회는 교화 새바람의 한 축을 담당했다.

사라진 교리강습회와 대안 모색
이렇게 원불교 교화 부흥을 이끌었던 교리강습회가 지금은 그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다. 왜일까?

김도종 교수는 "1960~70년대는 농촌이 중심이었지만 산업사회를 맞으면서 점점 농촌에 사람이 없어지는 이농현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며 "도회지 교당에서도 점점 사람들의 생활이 바쁘게 변하면서 2박3일 등의 교리강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원100성업회 정상덕 교무는 "예전에는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창구가 별로 없어서 총부에 법사를 모셔다가 교리를 학습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장소가 교당이었으며 모이면 이런저런 재미가 생기기도 했다"며 "지금은 인터넷, SNS 등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지적욕구를 충족하게 되고, 다양한 취미 생활과 좋은 문화공간이 생김으로 점점 그 역할을 잃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교리강습회가 가졌던 장점이 시대변화에 따라 약해짐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잃어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원인으로 권도갑 교무는 "교리강습 특성상 내면실력과 공부분위기가 중요한데 원기70~80년에 교당 불리기가 교단적으로 큰 관심이 되다보니 모두 공부보다는 사업에 정신을 쏟아 내실이 약해진 것 같다"며 "교리강습은 교무부터 순수하게 우리 교법에 불이 붙어 그 환희심으로 대중에게 쏟아 부을 때 교화가 살아난다"고 말했다.

교리강습회에서 대중을 지도해야 할 교무들이 사업에 시간을 대부분 뺏겨 교법훈련과 자기개발이 약해진 것도 중요한 이유로 꼽았다. 이러한 원인들에 의해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 '교리강습회'의 대안에 대해 정상덕 교무는 "질적인 교화 향상이 필요한 시점이다"며 "앞으로는 내적실력과 함께 더욱 성숙된 문화로 접근하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은이들이 공감할 수 있고, 세계적 흐름에 뒤쳐지지 않는 트랜드, 세련된 교리강연대회와 만남의 장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현재는 '교리강습회'를 대신해 시민선방, 교리특강, 교도 1일 훈련, 소태산마음학교, 교당 원스테이(Won-stay) 등 시대와 대중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훈련을 개발해 참가자들의 욕구를 총족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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