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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100년을 앞두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 9인연원실천단과 교화운동
원기100년을 앞두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 9인연원실천단과 교화운동
  • 민소연 기자
  • 승인 2014.11.21
  • 호수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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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만에 300% 성장한 '9인연원실천단', 대전충남 '2+1', 부산 '삼하나'로 결실
▲ 원기85년 부산대법회의 열기를 잇기 위해 삼하나운동본부가 발대식을 가졌다.
원기100년을 앞둔 시점에서 본사에서는 옛 것을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현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이다. 12주에 걸쳐 교단의 각 분야에서 희미해진 각종 사업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이는 창조적 계승의 측면과 미래 에너지로의 승화를 간절히 염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달에는 주무·순교의 역할찾기, 교리강습회의 변화, 교화운동, 청소년지도자 산실 꿈밭과 학생 야영대회에 대해 살펴본다.

올해는 '9인연원실천단'이 탄생한지 10년째 되는 해다. 원기89년 서울교구는 교도 4종의무와 10인1단 단조직에 바탕해 한 사람이 9명의 단원을 만드는 '9인연원실천단'을 조직했다.

3월 발대식에는 2백명이 넘는 교도들이 참여, 서울교구 뿐 아니라 전 교단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수는 당초 예상인 150명을 훌쩍 넘은 것이었고, 당시 관계자들은 이를 "그간 갈증났던 교화를 위해 힘을 모아보자는 뜻이 결집된 것이다"고 평가했다. 또한 2005년 인구센서스 조사를 1년 앞둔 시점이라 더욱 그 기대나 의지가 컸다고 볼 수 있다.

교화운동에 목말랐던 교도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발대 5개월만인 8월 신청자는 395명에 이르렀고, 이미 9인연원을 달성한 서원실천자는 52명에 달했다.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록이요 역사였다. 무엇보다도 전년도 원기88년 통계에 비춘 교화성적은 탁월했다. 8월 이미 전년도 1년 동안의 입교자 수를 2.5배 넘어선 1902명을 기록한 것이다. 이 성장세는 연말까지 이어가, 그해 총 입교자 수는 2539명에 이르렀다.

9인연원실천 운동을 진두지휘했던 당시 이성택 서울교구장과 교구는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였다. 교화 열기가 단발성으로 식어버리지 않도록 후속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분기별 교육을 진행해 150~200명의 교도들이 참여했으며, 10월~11월에는 총 5강으로 구성된 '시민공부방'을 이 교구장이 직접 진행했다. 늘어나는 입교자들에게 소속감과 교리에 대한 이해심을 부여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교단 역사의 귀한 재산인 '교리강습회'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9인연원실천단의 탄생 첫 해, 연말에 열린 서울교구 교의회는 그 시상내역이 면면이 화려했다. 임창융 교도는 101명을 입교시켜 교화특별상을 수상했으며, 이운모 교도는 군복무 중에 장병 47명을 입교시켰다.

이 밖에도 하승운 교도가 42명을 입교시키는 등 걸출한 '교화능력자'들이 시상대에 올랐다.

▲ 원기89년 3월27일에 열린 서울교구 9인연원실천단 발대식에서 교도대표 4인이 선서를 했다.

9인연원실천단의 폭탄효과가 잦아든 이듬해에도 서울교구의 교화력은 상승가도를 달렸다. 원기90년 두 번째 발대식에는 365명이 참가했으며, 이 중 재지원한 인원은 1백명이었다. 서울교구는 이 해 전년보다 1백여명 많은 2697명의 입교를 기록했다. 9인연원실천단 발대 2년동안 이전에 비해 300% 이상 양적 성장을 이뤄낸 것이다.

서울교구의 교화 성적이 오르면서 보완해야할 점도 늘어났다. 교당 간 경쟁구도를 보이다보니 성적이 나지 않는 교당들은 흥미를 잃기 쉬웠다. 이에 교당들 사이의 편차를 줄이며 함께 나아가는 전략이 요구됐다. 또한 무엇보다도 입교와 교당 출석 간의 거리를 좁히는 방안이 계속 요청됐다. 입교 증가에 따라 법회출석수도 꾸준히 상승했지만, 입교 수에 못 미치는 한자리수 상승률을 보이고 있었던 것. 이에 따라 신입교도들을 위한 매뉴얼과 눈높이 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원기89년 3월부터 이례적인 교화성장을 보이며 경기인천교구 등으로 퍼져나가던 9인연원실천운동은 3년만인 원기91년부터 주춤하기 시작했다. 원기91년 8월 교화 실적은 전년도 대비 7~8%에 그쳐 크게 위축된 것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대인사이동과 수위단·종법사 선거, 교정원장 교체 등을 앞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9인연원실천운동을 이끌었던 이성택 교구장의 부재가 가장 큰 요인이라고 평가된다.

원기91년 연말에 열린 정기교의회에서 서울교구는 3년간의 9인연원실천단 활동으로 입교한 교도들을 법회출석과 연결시키는 '법회출석 배가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했으나, '9인연원실천단'의 이름은 사업계획에서 사라지게 된다. 800명에 그치던 서울교구 한해 입교자를 2600여 명으로 단숨에 끌어올린 역사적인 교화운동의 종말이었다.

9인연원실천단의 영광은 3년에 그쳤지만, 이 성공적인 교화운동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의 의지와 역량이 가장 중요하며, 이름 뿐이 아닌 후속조치들과 보완책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배웠다. 또한 교도 한사람 한사람의 의지와 실적보다는 전체적인 합력으로 소속체 단위의 경쟁 분위기가 유효했다는 평가다.

불과 10년전인 9인연원실천단을 기억하는 서울교구 교도들은 당시의 열띤 분위기와 신앙에 대한 확신을 추억하며 새로운 교화운동에 목말라있다.

그동안 교단은 크고 작은 슬로건을 내걸고 교화운동을 추진해왔지만, 지역 특성을 더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교구 단위의 전략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 원기90년 대전충남교구의 교화운동.

원기90년 대전충남교구가 내세운 '2+1(Two Plus One)' 역시 교구 교화운동이었다. '2명을 입교시키고, 한명을 출석시킨다'는 '2+1' 역시 2005 인구센서스에 대비하는 의미가 컸으며, 3월 '제1차 2+1 서원대회'에 350여명의 교도들이 참여하며 시작됐다. 첫해 입교자 678명을 기록하며 힘차게 시작한 2+1은 분기별 서원대회에서의 시상과 감상담 발표로 교도들의 분발심을 이끌었다.

교구 단위의 교화운동의 역사를 더 거슬러가면 원기80년 부산교구 삼하나운동이 있었다. 5년뒤 좌산종법사초청대법회를 준비하며 시작한 삼하나운동은 '한사람 깨우고 한사람 인도하고 한사람 키우자'는 세가지 실천을 하자는 의미다. 부산교구는 이와 함께 '교당갑시다'는 출석운동도 병행했는데, 1만7천명을 목표로 한 삼하나운동의 효과는 4년만에 법회 출석률 30% 성장이라는 값진 결실을 맺었다. 대법회 이후 '삼하나운동본부'가 본격 발대, 열기를 이어갔으나 원기89년 가족교화에 집중하며 결산한 바 있다.

교단 차원의 교화운동도 존재했다. 1인1도 운동은 원기5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꾸준한 교화 비전이 되어왔다. 그러다 원기83년 새 교화부(현 교화훈련부)가 의욕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는데, 한동안 각 교구별 교화정책과의 조율이나 호응도가 낮아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산종사탄생100주년을 맞아 교당불리기운동과 함께 강조되는 듯 했으나, 이후 전략적인 특정 캠페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준이나 구호 정도로 인식되어 힘을 잃었다고 평가된다.

인사이동에 따른 정책이나 캠페인의 단절은 재가교도 뿐 아니라 출가교도 역시 교단의 큰 문제점 중 하나로 꼽는 한계다. 교화의 가장 막중한 책임이 있는 교화훈련부가 이렇다 할만한 교화전략이나 운동을 내놓지 못하거나, 내놓았다고 해도 유야무야 되는 현실에는 이러한 배경이 크다. 교구 역시 불과 몇 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터라 대동소이한 실정이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몇 년이나마 성과를 거두고 청사진을 제시했던 교화운동은 존재해왔다. 교단의 교화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던 교화운동의 책임자들이라고 앞날이 두렵지 않았을까. 문제는 의지다. '뭐라도 해야한다'는 위기의식이 무거운 이때, 서울교구의 9인연원실천단 등 교단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교화운동은 교화 정체의 해결책이자 희망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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