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을 보존해야 삿된 데에 떨어지지 않는다

凡行事之際에 萬象森列하나니 不可太急이라 紛紜華頭가 悉從心頭所出하리니 一切奇異殊勝善怨應變之事가 隨汝心設하며 隨汝心生이며 隨汝心求며 隨汝心現에 若使道心으로 爲人心所牽이면 便墮他圈中하야 正退邪進하리니 豈不愼哉아

(직역) 무릇 일을 할 때에 만 가지 형상으로 벌여질지라도 아주 급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번거로운 생각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모든 기이하고 특별한 선과 악에 응하여 변하는 일이 네 마음 따라 건설되며, 네 마음 따라 생기며, 네 마음 따라 구하며, 네 마음 따라 나타나는 것이라, 만약 도심으로 인심을 끌려고 하다가 도리어 다른 권속 가운데 떨어지면 정도에서 물러나 사도에 나아가니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무시선 무처선 교리 근거

앞 글에서 인용된 〈정관경〉은 〈영보정관경〉을 말한다. 〈영보정관경〉의 정은 정(定)이며 관은 혜(慧)라고 한다. 불가의 정혜쌍수의 수행법을 도가 내단 사상에서 간명하게 밝힌 글이다.

소태산대종사는 〈정관경〉을 선불교의 〈선요禪要〉와 같다고 하였다(定觀若禪要). 정산종사는 정혜쌍수 선법의 〈정관경〉을 번역하면서 처음으로 무일불공(無日不工)무처비선(無處非禪)의 글귀를 넣었다. 곧 공부 길을 얻으면 공부하지 않는 날이 없고 선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였다. 공부와 선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음공부 길이란 정정에 들어가는 길을 의미한다. 삼학 병진선법이다. 마음공부의 목표는 자성의 지혜 광명을 밝혀 비추지 않는 곳이 없고, 통하지 않는 이치가 없게 하는 원통(圓通)의 수행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후에 무시선 무처선 교리 표어의 근거가 되었다.

자성과 일이관지

불가 선종의 삼조 승찬은 대오(大悟:큰 깨달음)의 경지를 통연명백(洞然明白)한 마음이라 하였다. 〈휴휴암좌선문〉을 쓴 몽산화상 또한 적적성성한 자성광명을 대오의 법으로 삼았다(以大悟爲則).

정산종사 또한 통연명백한 자성을 밝히는 정정수행으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을 외도의 정정을 하는 사람이라 하여 크게 경계하였다. 외도의 정정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욕심을 품고 사사로운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공부 길을 그릇되게 인도하고 재물을 취하여 죄를 짓고 세상을 혼란하게 한다고 하였다.(〈수심정경〉 총명강요장)

〈중용〉에 도심과 인심에 대해 밝히고 있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한 것이니 오직 신령스러운 밝은 한 마음을 가져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 하였다.(道心有微 人心有危 惟精惟一 允執厥中) 정일은 신령하게 밝고 진실한 하나가 만유에 두루 한 것이다. 공자가 말한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로 관통함)와 같다.

정산종사는 원상(圓相)은 공자가 말한 일이관지와 같다고 하였다(圓相解義). 〈정산종사 법어〉에 "원불교는 무신입니까 유신입니까" 물으니 "인격적 신은 인정하지 아니하나, 우주를 관통하여 두루 있는 신령한 진리는 인정한다"고 하였다.

도심과 인심의 구분

중이란 어디에 지나치지도 않고 못 미치지도 않은 감정이 나오기 이전의 도의 경지이다(喜怒哀樂未發謂之中). 도심이란 하늘의 마음인 성품의 마음으로 거느리는 솔성이다. 도심을 수행하는 것을 교화라 한다(〈中庸〉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인심은 인간의 오욕에서 나오는 욕심의 마음이다. 신령한 기운을 가진 하늘의 마음은 참으로 미묘하여 그 밝은 덕은 헤아릴 수 없다. 인간의 욕심은 지나치면 탐진치를 낳고 나와 남을 고해로 빠뜨린다. 도심이든 인심이든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진다. 마음에 따라 모든 것이 있어진다.

인심은 욕심에서 나오는 감정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섯 가지 욕심이 있다. 재물욕 색욕 안일욕 명예욕 식욕이다. 이 욕심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며 인간 낙이다. 도심은 생함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 공적영지의 광명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과 인간과 만물에 모두 있는 것으로 하늘이 명한 명덕이라고 한다. 이 밝은 마음이 인심의 욕심에 가리어 어두워지므로 도심을 지키라 한다. 밝은 마음으로 인심을 끌려고 하다가 도리어 도심이 인심에 묻혀 버리는 것이라 항상 밝은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공부 필요성

비록 적적성성한 자성불을 보아 공적영지의 광명이 나타나 견성을 하였다 할지라도 몸으로 익힌 본능으로 나오는 오욕의 습성은 바로 고쳐지지 않는다. 인심으로 생활하면서도 도심을 지켜 인심에서 오는 탐진치를 밝게 비추는 지혜를 갖고 수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요즘 같이 활동하는 시대에 '도심인 정일이니 중이니 하는 수행을 할 수 있을까'하는 반문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한 현대사회 일수록 성훈을 깊이 생각하는 명상과 선법이 더 필요한 시대이다.

사람의 마음이 정일하지 않고 중용을 잡아 도심을 챙기지 못하면 현란한 물질문명이 오히려 아수라장의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류에게 정신개벽의 문명은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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