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혼란 속, 피난 중 만난 은인 김영신 대봉도

▲ 김영신 대봉도를 늘 마음에 그리워하는 김남전 교도(왼쪽)와 부군 박종근 교도.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 어떤 말로 당시 상황을 표현 한다 할지라도 현장의 아픔과 긴박함을 어떻게 체감할 수 있겠는가. 체험자들의 증언에 말 없음으로 피난민의 행렬에 생각을 얹고 오롯이 함께 걸어가 본다. 전쟁 통의 무질서와 아수라장,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 겨울의 길목에서 김남전 교도를 만났다. 전쟁으로 피난 후 만난 원불교 생활을 풀어냈다. "내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하지만 김영신 선생과 만난 이야기는 꼭 하고 죽어야 편히 눈을 감을 것 같아 기자를 열심히 찾았다."

경남 함안교당에서 교도생활을 한 김남전 교도(81·주타원). 그는 10년 째 원광효도마을 상록원에서 수양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개성에서 피난하여 도착한 곳 전주

이북이 고향인 그는 "개성에서 부자로 살았다. 아버지는 늘 이남으로 가고 싶어 했다.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한 밤중에 트럭을 탔지. 사람들로 가득했어. 얼마나 급했으면 문을 제대로 안 닫고 출발했어. 그 통에 나는 길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어. 차를 멈추고 다시 탈 수도 없었지. 그대로 가족들과도 영이별이 됐어." 가는 차를 바라보며 가족들이 애타게 손을 뻗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김 교도는 차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살려고 그랬나, 누가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 줘서 살아났지. 피난민들 속에서 남쪽에 도착해 전주까지 내려오게 됐어."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여자 경찰관이 집에 가서 같이 살자고. 통일되면 바로 집으로 보내준다고. 그렇게 가사를 도우며 살았지. 그런데 하루는 사람들이 '좋은 법설 들으러 가자'고 하기에 따라나섰어. 훗날 알고 보니 거기가 전주교당이더라구."

당시 전주교당에는 융타원 김영신 대봉도가 봉직했다. 그날 설법은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였다. 그는 "많이 울고 살았어. 그런데 그 법설을 듣고 '아- 내가 짓고 받는 이치였구나. 원망할 것도 없네'하는 생각을 하고 울지 않고 생활했다"고 말했다. 이후 교당을 자주 찾아가 융타원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루는 융타원님이 '나를 따라 총부로 가자'해서 총부 인근의 이리 보육원에서 생활했다." 그는 고아원에서의 생활도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한국전쟁 후라서 고아들이 아주 많았어. 그 중 내가 제일 큰 애였지. 애기들 보살피는 일은 내 일이 됐어. 잠자리 정리랑 엄마 보고 싶다고 우는 아이 달래는 것이 내 역할이었어. 난 공부도 좋았어. 고아원 살면서 일상수행의 요법과 독경 등을 일주일 만에 다 외웠지. 고아원 아이들 데리고 총부 성탑을 다녔어. 당시 성탑 앞에 보건진료소가 생겼는데, 송자명 선생이 보건소에 근무하기에 따라가서 보조도 하고 청소도 했어."
▲ 김영신 대봉도와 대각전 뜰에서 담소를 나누던 그리운 시절의 사진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잦은 병, 출가를 포기하다

이후 김 교도는 융타원 대봉도를 따라 동래교당에서 공양원 생활을 했다. 늦게나마 여중에 입학해 공부도 하며 지냈다. "원불교 정신으로 잘 살았어. 그런데 융타원님이 너무 고생하며 살아서 그런지 불면증이 심하게 걸렸어. 계속 교당에 의지할 형편이 아녔어. 나는 '나가서 공부하고 다시 원불교 정신을 갖고 돌아와야겠다' 생각했어. 그렇게 간 것이 부산시내 병원을 소개받아 그곳에서 오전에는 병원근무하고 오후에는 조산원 공부를 했지. 검정고시를 봐서 다행히 합격도 했어."

병원 일을 하며 자격증을 얻은 그는 총부에 있는 송자명 교무에게 편지를 했다. 그는 '이제 조산원 자격증도 합격했고, 병원일도 잘 할 수 있다. 동화병원에서 일 하면서 전무출신도 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보냈다. 답장을 받은 그는 간호사 두 명과 함께 동화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 교도도 고질병이 있었다. '천식'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잘 정도였다. 그렇게 때문에 자신있게 출가를 할 수 없었다. 동화병원에서 1년을 근무하고 건강상 이유로 그만 두었다. 그리고 함안 보건소에 취직했다. 당시 한 달 월급이 6천원이던 시절이었다.

"원불교가 함안에 생기는 경사가 났어. 너무나 반가웠지. 나는 원불교가 친정이려니 늘 생각했어. 부모가 없어도 나는 원불교 때문에 잘 살았어. 그래서 아이들에게 교당가자고 할 때도 '외가집 가자'하고 데리고 다녔지." 함안에서 40년을 사는 동안 교당의 주인으로 교도생활도 열심히 했다. "원불교에서 맺은 인연이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쳐 대학생활도 무난하게 할 수 있었어. 지금은 모두 일원가족으로 뿌리를 단단하게 맺었지." 큰딸은 안동교당, 작은딸은 강남교당, 아들은 수원교당에서 교도 생활 중이다.
▲ 김영신 대봉도와 그 인연들이 대종사성탑에서 멋스런 구도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간절한 기도생활과 내생 서원

김 교도가 길고 긴 인생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안 그 곁을 말없이 지켜주는 남편 박종근(80·지산)교도. "나는 혼자 살기를 원했어. 그래서 서른되도록 혼자였다. 노처녀로 있을 때 영신선생이 편지를 보냈어. '혼자 사는 것 보다는 둘이 살면 더 좋겠다'하는 말에 결혼을 했지."

상록원에서 생활한지도 10년 째. 상록원에서 살면서도 상주선원으로 천일기도를 열심히 다녔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성탑을 들러 참배하고 천일기도를 할 때면 먼저 가서 촛불을 켰다. 그렇게 700일 째 기도를 하고 위력을 체험했다. 10년 만에 손자를 얻은 것이다.

"총부에서 지내는 천도재라는 재는 모두 참석했어. 인연 잘 맺어야 후손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그 믿음뿐이었다. 재에 참석해서도 우리 며느리에게 오라는 염원뿐이었지." 현재 6살인 손자는 4살 때 총부에 왔었다. 당시 총부에 온 손자는 성탑에 가서 합장한 손으로 자연스럽게 절을 두 번 하고, 기념관으로 달려갔다. 문이 잠긴 기념관에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영모전. 손자는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불전 헌공을 하는 기특함을 보였다. "윤회가 있다고 하니 틀림없이 선진님들 중 한 분이 오신 것 같아. 그렇게 믿고 있어."

죽을 뻔 한 병에 걸렸어도 원불교 신앙으로 그 모든 경계를 이겨낸 김 교도.

"올 봄에는 꼭 죽을 것처럼 아팠어. 가슴속에 늘 숙제로 남아있던 김영신 선생과의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네. 이생에서는 많은 업보를 청산하느라 출가를 못했어. 다음 생에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 꼭 영신선생님처럼 훌륭한 전무출신이 내 마지막 서원이여. 이생에서 받은 많은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서."

그의 이야기는 뭉쳐있는 실타래를 뽑듯 끝이 없었다. 함안교당 초창기, 자전거를 타고 마을마다 방문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출산을 돕던 공무원생활, 몸이 약해 자전거를 타고 가다 쓰러져 버린 이야기 등 사연이 무궁무진했다.

남편 박 교도와 함께하는 상록원 생활. "극락이 따로 없어. 이생에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흐뭇한 미소와 함박웃음으로 고단했고, 간절했던 인생살이에 대한 추억을 모두 녹여냈다. 한 겨울 함박눈이 펑펑 내리듯 감사생활의 은혜가 이들 노부부에게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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