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라도 내려주려나! 잿빛 하늘이 나지막하게 내려와 있다. 벽에 걸린 달력이 달랑 한 장만 남았다. 마지막 잎새 같다. 남아있는 날들을 세어본다, 민낯으로 저들 앞에 서기가 여간 미안해지지가 않는다. 이제, 며칠 후면 저들과도 고별사를 나누어야 한다. 이맘때면 언제나 그럴듯한 새 달력들을 미리 겹쳐 걸어두곤 했건만, 무슨 연유일까. 아직도 저 빛바랜 달력을 두고 바꾸어 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한 해가 간다. 실로 지난했던 한 해였다. 어처구니없는 참사들 속에서 참으로 안녕치 못한 한 해였다. 혹자는 만사는 아픈 만큼 성장해가는 것이라고 한다. 또 때가 지나면 옛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저 빛바랜 달력을 바꿀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저 <마지막 잎새>의 노화가(老畵家)처럼 저 달력위에 '담쟁이덩굴 잎'이라도 하나 더 그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떨치지를 못하고 있으니…. 심한 비바람에도 굳세게 견뎌내 줄 좀 더 건강한 나뭇잎으로 말이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다. 주인공들은 철저하게 붕괴되어버린 지구 그리고 인류에게 희망을 찾아주기 위해 끝없는 우주의 어둠 속으로 날아 들어간다. 인류가 살 수 있는 새로운 땅-항성을 찾아서다. 그들은 지구를 떠날 때 이미 죽을 각오를 했다고 한다. 그러한 각오와 신념이 없이는 그 어떤 가능성도 기대할 수 없음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들은 그곳의 1시간이 지구의 7년에 해당된다는 어둠의 중심에서 마치 외로운 대해 '백경(白鯨)'의 주인공처럼 사력(死力)을 다한다. 시간을 빨아들이는 블랙 홀, 그 끝을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5차원세계의 미로 속에서 영화는 그럴듯한 상상력과 함께 절절한 가족들(아버지와 어린 딸)사이의 스토리도 장장 3시간에 걸쳐 꽤나 리얼하게 터치해 나간다. 다행하게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인간의 위대한 내면의 정신과 영혼에 대한 경외의 신뢰와 자신감을 부추기면서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외치는 대사는 아직도 많은 여운을 남긴다.

한해를 보내며 새삼스럽게 논어(論語)의 '정자정야(政者正也)'를 떠올린다. 요즘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들 내면의 본성에 더욱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해본다, 어느 곳에건 뿌리만 내리면 말없이 하늘을 보고 곧게 자라주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조금만 더 각자의 본령을 지켜나가면, 어쩌면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것 같다는 믿음과 기대에서다.

이제 때가 된 만큼, 우리 모두의 정치(正治)를 기대해 본다. 다른 사람은 말고 우선 나 자신부터 나름 바르게 세워나가는 그런 자기쇄신정치 말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나, 그 일 말고 바로 나 자신과, 가정과, 또 이웃과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는가 말이다. 나 스스로가 나부터 내려놓고 정심정행에 솔선하면 천하가 다 바르게 응해 올 것이건만, 기껏 고등학교 교과서 정도에 나오는 저 정자정야의 칫수가 지금 우리 몸에 맞는 것이냐고 호통만 치고 있을 것인가! 자신의 신·구·의는 저 멀리 따로 두고 남의 시비만 앞장 서 가르고, 또 제 분수를 모르고 가르치려들기에만 분망했던 우치(愚癡)는 이제 지금쯤은 과감히 어제의 과거 속에 묻어두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하! 구상유취(口尙乳臭)한 범부의 소견일 뿐이라고 핀잔만 해 올 텐가.

우리는 누구나 항상 현명하거나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기에 더욱 우리는 자신부터 돌아보고 자신의 본령을 지켜나가야 한다. 할 수 있다면 바닥까지 내려가 나를 내려놓고 땅에 붙은 저 이름 없는 풀꽃에게서라도 조용한 자기절제의 미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해가 바뀐다. 이제, 오늘은 분명히 어제와는 달라야 한다. 블랙홀! - 정말, 나의 심중에 도사리고 있는 유령 같은 블랙홀들을 뛰어넘어야 한다. 유니버설 마인드(Universal Mind. 大宇宙心)까지는 아니어도 좋다. 주어진 심장으로 말하고, 겸허한 본성으로 다가가면 된다. 등을 대고 '입으로만 하는 감사생활'이 심중 깊숙이 찌든 원망의 기질들을 바꿔낼 수가 있을까. 겸양으로, 절제로, 배려로, 어질게 예를 다하는 말 한마디가 오히려 자존을 어지럽히는 어둠의 블랙홀을 돌파해 주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보자. 마음만 먹으면, 세상은 제법 살만한 곳이라고 하지 않은가!

<분당교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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