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있음은 함 없음으로서 되고 상 없는 모습이 진실로 온전한 것, 나를 놓으면 참 나 드러나고 세상을 위함이 도리어 참 나를 이루는 것이라네(有爲爲無爲 無相相固全 忘我眞我現 爲公反自成)."

대산종사의 '대적공실' 법문 가운데 인용된 정산종사의 오도시다. 정산종사는 대종사의 수제자로 대종사와 더불어 대산종사의 하늘같은 스승이다. 유는 무로서 되는 것이다. 이 무 소식이 관건이다. 세상 만물은 다 이 무로부터 비롯하고 또 마침내 무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무가 마치 유일신처럼 어떤 절대적 권위의 존재는 아니다. 무(無)가 이미 존재일진데 만물 중에 하나인 상대적 존재가 되고 만다. 이것이 불교가 여타 종교와 다른 탁월함이다. 대종사께서 '불교를 무상대도요 천하의 큰 도'라고 찬탄한 까닭이요 성리 수행의 묘미다. 이것에 토가 떨어져야 비로소 때 묻지 않는 수행이 가능해진다.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것은 만상의 존재 이전의 한 소식에 바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주에 천상만별의 무한 존재가 성주괴공과 생로병사와 흥망성쇠로 변하고 또 변하면서 끝이 없는 것은 이 무의 한없는 동력에 기인하는 것이다.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라 분별의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이 자리는 하늘과 땅이 나뉘기 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이며 한 생각 분별이 일어나기 전 소식이니 이 상없는 모습이 진실로 온전한 것이다. 그래서 이 무의 자리는 천하 만물이 낳고 죽는 자리이기도 하고 들고 나는 자리가 된다. 우리는 결코 생각을 가지고 이 온전함을 알 수 없다. 알았다고 함은 이미 안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석가도 알지 못하고 가섭이 전하지 못한다 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와 성현들이 이 소식을 알아 사생의 거룩하시고 자비로운 어버이가 되셨다.

불교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말하는 참선 수행의 원리가 바로 이런 것이다. 식망현진, 분별의 망녕된 생각을 내려놓으면 바로 진성의 참 마음이 드러난다. 이렇게 원리가 간명하게 드러났음에도 수행이 어렵다고 말한다. 우리는 왜 끊임없는 분별의 망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라는 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분별 망상의 원천이다. 인간사 모든 허물의 원죄다. 반야심경의 위대한 가르침도 결국 색수상행식의 몸과 마음이 본디 공함을 드러내어 삿됨을 부수어서 참을 드러내는 것 말고는 없다. 나를 내려놓은 것이야말로 최상승의 수행이요 정로다. '나'가 없으면 참 나가 그냥 드러난다. 억지로 나를 찾지 아니하여도 제 스스로 드러나기 때문에 무위다. 수행이란 마땅히 마음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나'만 내려놓으면 닦는 것조차 번거롭고 망녕된 일이다. 조촐한 둥근 옥을 아로새김이 병통이요 수행심 놓음이 참수행이다. 우리의 참 마음이란 본디 맑고 밝아 제 스스로 다 갖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화두의 마지막 구절에 반전이 있다. 앞 구절이 공(空)의 이치를 드러낸 것이라면 마지막 구절은 공(公)의 진리를 드러낸 것이 된다. 공은 공명정대하고 공평무사한 공이다. '나'를 잊으면 참나가 드러나는데 그 참나가 곧 공변된 세상이다. 그러므로 공변된 세상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참 나의 실현이 된다. 세상이 하나의 집안이요 이웃이 한 형제임을 아는 수행이 진실한 수행이다. 공이 불법의 정수이지만 공에 속으면 그릇된 공이 된다.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있다면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 한 지장보살을 떠올리게 한다.

<경남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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