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회상을 꿈꾸며

미륵불시대 도래와 용화회상을 꿈꾸며 구도열정을 불태운 미륵산인. 일원대도 정법을 만나 출가 수도함을 최고로 여기며 불경에 대한 학식과 많은 법문 기록으로 초기교서 편찬에 기여한 원산 서대원(圓山 徐大圓, 1910~1945) 대봉도.

그는 소태산대종사와 법연도 두터웠지만, 생질 관계로 혈연까지 겸한 지중한 인연이었다.

어려서부터 지혜가 총명하고 천성이 침착하며 어른스러웠다. 9세에 한문사숙에 입학해서도 동년배에 비해 뛰어났다. 백수보통학교와 법성보통학교를 마치고 가사를 돌보던 중에 의산 조갑종 대봉도의 인도로 원기14년에 입교하고 대종사로부터 '대원'이란 법명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두뇌와 학식을 바탕으로 해외에 나가 활동하리라는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대종사를 뵙고 3개월 동선을 마친 후 생각을 바꿔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원기14년에 출가한 그는 농업부원, 서무·상조·공익부 서기, 현금출납원 등으로 근무한 후 원기19년 25세에 연구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원기21년 순교무로 발령 받아 지방교화에 힘쓰다 원기22년에 감사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32세 되던 원기26년에 남자 정수위단원에 피선됐다.

도인의 풍모에다 구도열정이 특출해 당시 제자들은 정산 송규, 주산 송도성 종사와 견줄 만큼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종경〉신성품10장에 나오는"세 사람 중 누가 유망 하겠는가"하는 물음이 이를 말해준다. 그에게 돋보이는 것 중의 하나는 청아하고 품격 높은 음성이었다. 대종사께서도 "대원아, 천도법문을 읽어라. 너의 음성을 들으면 천도가 절로 되는 것 같구나" 할 정도였다.

교단초기 문건의 발표문, 건의서, 임원록 등에 그에 대한 사료가 많이 있다. 특히 〈대종경〉만 해도 변의품4~8장, 천도품31장, 신성품18장, 교단품15장, 전망품18장 등에서 등장한 비중 있는 제자로 대종사 법설 수필을 많이 해 〈원불교교전〉편수에 기여했다. 또한 시문에도 뛰어나 우당(愚堂), 무위생(無爲生), 미륵산인(彌勒山人)등의 필명으로 주옥같은 글을 발표했다.

그는 삼학병진 공부를 알면서도 수양에 대한 집념과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이 강했다. 건강관계로 휴무의 기회가 주어지자 산사를 찾아 수행 정진했다. 이것이 교중의 논란거리가 되어 전무출신에서 제명되는 일까지 겪었다.

이에 스승과 교법에 대한 자신의 불변의 신성을 표하기 위해 손을 끊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대종사의 경륜은 삼학병진, 영육쌍전, 이사병행이었기에 입산 행각에 대한 파장은 컸다. 대종사께서는 이를 크게 꾸짖은 내용이 〈대종경〉신성품 17장의 내용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우리 교법을 경시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은 당시의 사료들이 밝히고 있다.

이후 출혈과 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서울교당에서 정양을 했다. 정양 중에 대종사 열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성가53장이 된 '추모의 노래'를 영전에 바쳤다. 또한 대종사찬송가, 석존찬송가, 결제가, 해제가, 개교경축가, 위령가, 연화대등을 작사해 성가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성가를 통해서 그의 사상의 한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교단 기관지와 수필집 '우당수기'를 통해 초기 교단사에 있어 중요한 사료를 남기고 35세의 아까운 나이에 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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