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 대산종사를 모시고 뒷줄 왼쪽 이혜선 교무 .
전주 모악산 대원사가 위치한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상학마을에서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난 이혜선 원로교무. 형제들과 우애있게 생활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20세쯤 인연 따라 좌포에 생활 터전을 마련했다. 좌포에 살면서 심의선 교도의 연원으로 좌포교당에 입교, 교도 생활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집안 살림도 기울어지고 말았다. 결국 좌포를 떠나 고향 상학마을로 돌아왔다. 집에 있으면서 전주 교동교당을 걸어서 법회에 다녔다. 당시엔 전주에 교동교당 하나 뿐이었다. 교동교당에는 융타원 김영신 교무, 이성각 할머니가 있을 때였다. 그때 둥그런 마크를 할머니가 차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그때 출가를 결심했다.

원기37년 마령교당 임원, 원기41년 중앙총부 임원, 원기44년 중앙선원 수학, 원기 46년 법무실 임원, 법무실 주무를 거쳐 교화현장에 가게 된 것은 원기56년이다.

당시엔 법무실을 조실이라 말했다. 그렇게 조실 근무를 마치고 팔봉교당에 부임했다. 지금의 삼성교당이다. 한창 교당 신축할 때 교당에 발령이 된 것이다. 그때는 초가집이었다. 태덕권 선생이 근무할 때였다. 삼성교당 신축을 마치고 원기58년 7월에 대마교당 교무로 부임했다. 모든 교당이 그랬듯이 대마교당도 어려운 환경이었다. 대마교당에 7년을 근무하면서 총부에 교금 한 번 내지 못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았지만 교도들과 열심히 노력해서 교당 유지답도 마련했다. 어느 정도 교당생활이 안정되자 '이제는 총부 교금도 내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총부에서 중앙양로원으로 인사이동을 하게 됐다. 대마교당에 살면서 김상화 교무와 박도인 교무가 전무출신 출가의 인연을 맺게 했다.

원기65년 8월 중앙양로원으로 부임을 했다. 당시 중앙총부에는 교화부, 교육부, 공익부 3개 부서 밖에 없던 때였다. 공익부에서 양로원을 관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오희원 공익부장이 "사람을 구하지 못해 걱정이다"고 늘 말했다. 처음엔 스치는 말로 들었다. 여러 차례 그렇게 걱정을 하기에 물었다. "무슨 사람을 구하는데 그렇게 자주 걱정을 하시냐." 공익 부장은 "대종사께서 교화 교육 자선 3대 사업을 강조하고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언제 해도 하긴 해야 하는데 사람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고 구체적인 고민을 털어 놓았다. 고아원이나 양로당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됐으니 이제는 자선사업을 추진해 대종사님 말씀을 받들어야겠다는 고민이었다. 특히 시에서 우리에게 청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익부장의 말을 듣고 보니 내 마음에 "대종사님께서 염원을 한 사업이고, 어른들이 저렇게 걱정을 하고 받들어야 한다고 한다면 언젠가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구나"하고 생각됐다. 나는 늦게 출가해서 대종사님도 못 뵈었다. 그러나 대종사께서 내 놓으신 〈정전〉, 〈대종경〉 법문이 있고, 나는 심법이라도 한번 닮아가 봐야겠다 생각했다. '대종사님이 방언답을 막았듯이 그 정성을 들이댄다면 자선원을 이룰 수 있겠다'는 마음이 정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공익부장을 찾아갔다.

"자선원에 근무해도 전무출신인 것인가요?
"아이고 이 사람아, 전무출신 중에 구하려고 하니까 그렇게 사람 구하기가 어려웠지."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