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나의 입교(원기40년)연원은 응산 이완철 종사이다. 내가 살았던 곳은 삼례와 가까운 신금리라는 곳이어서 어릴 적 수계농원을 잘 다녔다. 평소 가까이 지냈던 외갓집 언니가 나를 원불교로 이끌어 주었다. 언니는 나를 교당으로 이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한 번은 "야, 나 한 번 따라가자"라고 해서 언니 손에 이끌려 수계농원까지 가게 된 것이다. 나는 언니에게 왜 이런 곳에 데려 오냐고 했더니, "네가 공부하고 싶어 하고, 우리는 못 따라가도 너는 따라 갈 것 같아서 데리고 왔다"며 원불교에 한 번 다녀 보라고 알뜰히 챙겨 주었다. 당시 수계교당에서 재직했던 김봉식 교무가 나를 응산 이완철 종사에게 연원을 대 주었다. 그때 입교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 앞에 50원씩이어서 언니와 함께 100원 주고 만든 기억이 난다.

수계농원에서 입교를 한 후 그렇게 한참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집안에서 시집을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야, 우리 총부 한 번 가보자"라고 해서 총부에 오게 되었다. 그때 묘하게도 오빠 친구가 "네가 공부를 하려면 이걸 한 번 봐라"면서 〈불교정전〉을 건네주었고, 나는 "총부에서 마음공부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제가요, 원불교에 가서 10년만 공부하면 제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나를 좀 보내달라"고 했더니 아무 말씀도 안 하고, 당신이 직접 총부에 다녀왔다. 총부에서 정산종사를 뵙고 온 아버지는 내게 "대처 거기 가면 배우기는 참 많이 배우겠다. 내가 십 년 동안은 학비를 대줄 테니까 가서 공부해 보거라"고 했다.

그 후 출가를 하여 이순석 교무를 모시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나에게 "너는 아무리 생각해도 원불교 생활을 못할 것 같다. 그렇게 사치스럽고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면 못 살거든" 하면서 추천을 안 해주었다. 그 바람에 응산 이완철 종사가 내 추천인이 되었다.

원기49년에 중앙선원을 졸업하고 동산 이병은 종사와 인연이 되어, 신도안에서 대산종사를 모시고 2년간 살았다. 당시 신도안은 모두가 힘을 합쳐 초가집 아홉 채를 뜯어 새 터를 닦고 있었다. 신도안 살림이 어려웠던 때라 방학이 되면 신도안을 찾던 학생들을 총부에서 못 가게 했다. 그래도 오는 학생들이 있으면 그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했다. 없는 살림에 야학까지 하려니 한 번은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대산종사께서 "야, 지금 공들이면 내생에 못하면 내내 생에라도…. 우리 원불교가 오만 년 대운인데 언제라도 그 빚을 갚으러 온다"고 말씀해 주어 아무리 어려워도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 주었다. 동산 법사는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대중 앞에서 야단치는 경우가 없었고 공사시간에 한 번 논의하여 결의가 되면 그 뒤로 다시 거론하는 일이 없었다.

동산 이병은 종사와 신도안에서 6년을 살다가 초창인 도곡교당에서 4년, 장성교당에서 4년을 살게 되었다. 특히 장성교당이 전셋집을 내주었는데, 전에 병원으로 쓰던 건물이어서 법당으로 쓰고 나머지는 세를 내주어 살게 되었다. 어느 해 여름에는 대산종사께서 광주에 가다가 장성을 거쳐 가게 되었는데 교당에 오셔서 세 들어 사는 집안의 식구들까지 모두 모이게 해서 30여 명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 후 교동교당을 거쳐 영광교구청으로 가게 되었는데, 동산 이병은 종사가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라며 염산교당에 가서 조금 있어 보라고 해서 이수오 종사 밑에서 살게 되었다. 천 평이 넘는 부지에 담이 없으니 사람들이 공원인 줄로 생각하고 오가기에 교도회장의 도움으로 담을 두르고 그곳에서 3년을 살고 당리교당으로 인사이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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