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대(大)를 나누어 삼라 만상 형형 색색의 소(小)를 만들 줄도 알고, 형형 색색으로 벌여 있는 소(小)를 한덩어리로 뭉쳐서 대(大)를 만들 줄도 아는 것이 성리의 체(體)를 완전히 아는 것이요, 또는 유를 무로 만들 줄도 알고 무를 유로 만들 줄도 알아서 천하의 모든 이치가 변하여도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중에 변하는 진리를 아는 것이 성리의 용(用)을 완전히 아는 것이라, 성리를 알았다는 사람으로서 대와 무는 대략 짐작하면서도 소와 유의 이치를 해득하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아니하나니 어찌 완전한 성리를 깨쳤다 하리요."

대를 나누어 형형색색의 소를 만든다는 것은 삼라만상의 소자리에 대라는 진공묘유의 속성이 들어있다는 뜻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처처불상이라는 표어의 존립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또 소를 한덩어리로 뭉친다는 것은 모든 상대적인 분별심을 놓고 자타일여의 대아가 되는 것이며, 삼라만상 모두가 없어서 살수 없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사생일신의 대아의 심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의 체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나눌 수 없는 진리의 당체인 진공묘유를 알고 소라는 삼라만상속에 처해있되 대를 여의지 않는 심경이다. 다시말해 삼라만상을 대하되 청정법신불임을 알고 부처로 대하는 심경이다.

유를 무로 만들고 무를 유로 만든다는 것은 우주에 있어서는 삼라만상의 변태로 주야, 사시순환, 풍운우로등 진공묘유 조화작용을 이름이요. 마음에 있어서는 능히 선은 두고 악심은 제거하여 업력을 굴리는 인과로 나투는 것이며, 때로는 선악간 모든 생각을 비워 버릴 수 있는 힘이다. 일어나는 악심을 그대로 행하게 된다면 유무에 떨어진 것이지 유무를 능히 운전했다고 볼 수가 없다. 만들줄도 안다는 것은 유무에 걸림이 없어 능히 나타내 보이기도 하고 능히 없앨 수도 있어야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대와 무를 짐작하는 것은 형상없는 자리에 표준을 하므로 오히려 공에 떨어지기가 쉽다. 그러나 소와 유는 대를 여의지 않는 소와 유이므로 성성불매한 영지가 안이비설신의 육근작용에, 사사접물에 지공무사하게 나타나는 것이기에 성리의 용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매매사사에 소소영령한 청정심으로 경외심을 잃지않고 치연하게 사사불공을 하는 것이다.

다행이 대종사께서 무시선법으로 진공묘유의 수행문을 내것 삼게 하셨으며, 사은을 통해 진공묘유의 극치를 네가지 은혜로 표준잡게 해주셨다. 진리를 얘기 할때 상생의 은혜가 행동으로 취사로 나오지 않는다면 대소유무에 토가 안떨어졌기 때문이며 사회에서 데모를 할때나 공권력이 사용될때도 항상 공정한자리에서 상부상조가 되지 않는다면 이는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나눌 수 없는 성리를 대소유무로 나눠서 더우잡게 해주시고 사중보은의 길로 구체화하여 은혜세상으로 만생령을 구원해 주신것이 대종사의 대자대비라 생각된다.

<기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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