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36년 4월21일 원평교당에서 양혜련 교무의 연원으로 입교한 석타원 김혜실(碩陀圓 金惠實) 원로교무.
원기41년 출가서원 후 동래교당 간사생활을 3년이나 했다. 이후 중앙선원에서 수학, 제3회 졸업생이 됐다.
김 원로교무의 첫 교화지는 수지교당이다. 1년의 짧은 인연을 마치고 운봉교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7년을 근무하며 지리산권역 교화에 혈심혈성을 다했다. 이후 장수교당으로 발령받아 10년을 근무했다. 그는 "10년을 근무하는 동안 교당을 동촌 시내로 이전해 건축하고 봉불식을 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김 원로교무는 출가 후 교당과 기관을 오가며 근무를 했고, 그 보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수교당에서 근무할 때가 가장 보람찼다. 그때는 장계출장법회도 활발하게 다녔다. 또 장계중계방송국에서 몇 개월간 설교도 했다. 토요일에는 오후2시에 장계에서 법회를 보고 중계소에 가서 설교를 했다. 일요일에는 장수교당 법회를 보았다. 특히 장수교당에서 10년을 살고 집짓고 1년을 더 살았는데 굉장히 바쁘게 살았다. 고생을 많이 한 만큼 보람도 컸다. 교당 재정도 없는데 희사를 많이 받아서 교당 터도 확장하는 등 교도회장이 인사이동을 못하게 붙잡았던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장수교당에서의 보람찬 교화 활동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 교도회장이 633.6㎡, 그때 시가로는 2천만 원이 넘는 땅을 희사했다.

회장의 7남 3녀 자녀 중 둘째 딸이 원불교에 땅을 줬다고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회장은 "할아버지 명목으로 희사를 한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좋은 일을 해 드리려고 한 것인데 출가외인이 왜 간섭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아들도 "교무님께서 교당을 지어서 큰 교화를 하신다는데 왜 간섭하느냐. 아들인 나도 가만히 있다"고 누나를 달랬다. 가족회의 후 교당 일은 탈 없이 잘 진행됐다.

장수교당에서 장계출장법회와 중계소 방송설교를 열심히 임했다.

하루는 회장이 "왜 남의 집 법회는 토요일에 가서 보고, 재도 지내주고 행사도 하면서 우리 장수는 등한시하느냐"며 조언했다. 이에 김 원로교무는 "장수교당 일도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다. 교무와 교도회장 사이에 격의 없이 오롯한 공심으로 살았기에 당시에는 그만한 교화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교리강습회를 해마다 진행해 지역교화도 수월했다. 이후 김 원로교무는 수지교당과 운봉교당에서 좌산상사를 모시고 근무했다.

그는 기관에서 근무할 적의 보람에 대해 "이리보육원에 근무했을 때 가장 보람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린아이들을 보살피며 꿈과 희망을 심어줬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당과 기관근무의 장단점을 "기관에 근무할 때는 각자의 업무에 맞는 인원이 많아 수월했다. 하지만 교당에서는 혼자 재 지내야 하는 일 등 각종 의식행사와 법회, 순교를 하려니 손이 모자라기 일쑤였다. 젊은 시절이었기에 다 해내고 살았다. 또 중요한 의식행사에는 늘 스승님을 모셔 설법을 청했다. 또 인근 교무들을 초청해 독경반을 구성하고 서로 합력하면서 함께 교화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던 김 원로교무는 정화원로수도원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는 표준을 갖고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는 "규칙적인 생활이 참 중요하다. 장수교당에 근무할 때는 그 일 그 일에 일심으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 오가는 것도 그냥 알아졌다. 그만큼 밝아졌다. 교화도 재미있었지만 공부하는 재미도 컸다. 이제는 수도원에서 다 놓고 살고 있다"며 환히 웃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