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 송규 종사

 정산 송규 종사의 구도 역정은 치열하게 전개된다.

'구산수기(久山手記)'에 따르면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草田面) 소성동(韶成洞) 박실마을에서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거주하는 신축가옥이 벽산(碧山) 아래에 있는데, 독서실 뒤 심벽(深僻)하고 통천(通天)한 처소(거북바위를 말함)가 있는지라, 곧 그 곳에 소단(小壇)을 닦고, 매일 석후 삼경(三更, 한밤중)에는 반드시 청수(淸水) 일기(一器)를 받들어 단상에 올리고 기도했다.

정산종사 일심으로 빌기를 "송모 후일에 위대한 사업을 이뤄서 명전백세(名傳百世)하여 주시라"고 축천(祝天) 기도했다. 간혹 건어와 과일 등을 구해서 제물용으로 사용했다.

또한 정산종사는 장문(長文)의 글을 지어서 포부와 경륜을 나타내되 한번은 '장부 회국론(丈夫 恢局論)'을 지었으니, 그 대의가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마땅히 공중사에 출신하여 혜택이 생민(生民)에 미쳐가게 할 것이요, 구구한 가정생활은 벗어나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구산대희사는 이 글을 상주에 사는 이종 김석주(金錫柱)가 가져가서 돌려받지 않아 유감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정산종사는 지도서(地圖書)와 천문도(天文圖)를 그려놓고 묵시 묵념하였으며, 가정이 예로부터 유학을 숭상하는지라 조부(송성흠)가 매양 유서(儒書)를 근실히 읽기를 권하되, 정산종사는 자심중(自心中)에 오늘날 세상을 살면서 유서만 읽어 가지고는 큰 사업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하여 주야로 이인(異人, 도인)을 만나서 뜻을 이루리라 결심하고, 명산 거령(名山巨靈)을 찾아 유벽한 가옥을 많이 방문했다.

한번은 집에서 수백리되는 상주 백화산(白華山)에 가서 일박한 후 충청도 계룡산까지 순회키로 작정을 하고 이모집에 간다하고 가다가 조부의 소환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가야산(伽倻山)은 집에서 백여 리가 되는 명산인지라 3차례나 내왕했다고 '구산수기'에 밝혀져 있다.

당시에 각처로 순환하는 여비가 적지 않게 들되 조부와 부모 전에 사실을 고하지 않고 하는 출입인지라 여비를 청할 수 없어서 부인 여씨(중타원 여청운 사모)의 의복감중 옷을 만들지 않고 보관하던 것을 팔아서 여비로 하고 상품 은지환(上品 銀指環, 은가락지) 한 개를 팔아서 여비로 충용하였지만, 부인 여씨는 조금도 애석한 기색이 없었더라고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칭찬하고 있다.

또한 '구산수기'는 제3차 가야산 왕행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 유벽한 정사(精舍)에 유숙하다가 우연히 증산계(甑山系) 수련인의 지도를 입어 일야지간(一夜之間)에 고요히 앉아 주문(呪文)을 읽은 결과 정신이 열연(悅然)히 밝아져서 앞으로 불법(佛法)을 두고 공부해 나갈 일이 소연명석(昭然明析)한지라 이에 귀가하여 비로소 조부와 부모 전에 전일부터 남다른 뜻이 있었던 것을 고백하고 독방을 차려주어야 정좌(靜坐) 수양하겠다고 청하거늘 양대(兩代, 조부와 부모)가 다 허락하니 이 때에 정산종사의 나이 18세요 정사년(丁巳年) 4월이었다.

이어 4월부터 9월까지 6개월 동안을 수련에 주의하니 간혹 이적(異蹟)이 유(有)하였고, 당시에 3차례나 천상(天上)으로부터 서기(瑞氣)가 소거가옥(所居家屋)을 횡복(橫覆, 가로지름)하여 서천(西天)을 향해 연긍(連亘)하기를 두세 시간씩 하였더라.

<원블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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