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단을 통한 교화를 전개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만의 내부적 사고방식과 때로는 너무 경직된 적용이 무리가 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좀 더 유연하고 다양한 해석을 통해서 열린 교단을 이끌어 보자는 차원에서 몇 가지 지적과 비판적 제언을 해본다.

첫째 우리는 교화단을 이야기할 때, 항상 대종사의 창의적인 경륜임을 들고 나와 그 실행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십인일단의 단조직'은 원불교만의 독자적인 조직원리는 아니라는 점이다. 동학과 증산계의 조직과 거의 유사하다. 동학의 조직원리는 연원제(淵源制)이다. 도통연원(道統淵源)이라 하여 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가 연원주가 되고, 그에 의하여 포교된 신자들을 자기의 연원으로 간주한다. 교화단 조직 구성만으로 교화가 잘된다는 논리라면 천도교나 증산교의 교화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둘째 이단치교라는 개념를 들어온 교단과 교당의 조직을 단조직으로 촘촘히 구성하려는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단치교가 과연 그렇게 온 교도 구성원을 촘촘히 조직화하여 통치하라는 지상명령일까.

오히려 이단치교의 개념은 개인중심의 교단통치에서 수위단과 같은 집단지성의 힘을 요구하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이단치교는 교화를 위한 개념이지 교단의 모든 조직을 이것으로 통일하라는 조직구성을 위한 개념은 아닐 듯싶다. 비록'교화단'이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상황과 의미에 따라서 달리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

셋째 단 조직은 교도의 관리와 교단의 통치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 구성원들을 열 명 단위로 층층히 조직한 것으로 교화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단장의 공부내용이 단원들에게 전달될 조직구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장의 공부내용과 깨달음이 더 중요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깨달음의 내용만 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내용을 전달할 매체와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넷째 그물처럼 촘촘히 구성된 조직,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흡족할지 모르겠으나 새로 입교하는 신입교도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답답하고 아득해 보이지 않을까. 거의 대학교육 이상의 학력을 가진 현대인들이 과연 이렇게 관리되고 조직되는 단 조직을 선호할지 살펴볼 일이다. 너무 세게 묶으면 줄이 끊어지지 않겠는가. 종교의 문에 들어와서 뭔가 편안하고 휴식이 되는 느슨한 조직도 필요하다고 본다.

다섯째 십인일단의 단 조직은 과거 농경사회 지역성을 기반으로 하는 조직이다. 과거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한 지역에 머물러 살며 직업 등이 변하지 않는 시대의 조직원리이다.

그러나 현대는 이동성을 본질로 하는 시대이다. 각종 미디어와 통신이 발달되어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왜 과거의 조직원리만을 고집하는가.

여섯째 '행정 조직을 교화단 조직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행정은 없앨 수 있으나 교화단은 없앨 수 없다'고 한 대산종사의 법문을 중요한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소태산대종사는 '일원상과 삼학팔조 사은'을 제외하고 교리와 조직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시켜 사용하라 했다. 보다 근본적인 경륜에 더 무게를 실어 적용해야 할 것이다.

일곱째 교화단을 상의하달 하의상달 민주적 조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의 근본은 상의하달이 우선이지 하의상달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조직이다.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층층의 과정에서 다 걸러져 결국은 상부에 전달되지 않는 구조가 진실이다.

물론 옆단과의 소통도 사실상 힘들다고 본다. 분명한 것은 조직구성만으로 교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조직에 담겨 있는 철학과 정신에 힘이 있으면 어떤 조직구성을 하더라고 그 힘과 철학은 밖으로 넘쳐 흘러갈 것이다. 짧은 글에 많은 걸 담으려니 오해도 생길 수 있다. 용기 내어 제언하는 본심을 이해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총강분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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