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선생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들고서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 옛날에 옛날에 -

낙타는 어린 시절 선생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의 오후

'낙타'-이한직(李漢稷 1921-1976 시인)

이한직의 호는 목남(木南), 경성중학과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문장'의 추천을 받은 이한직은 주로 모더니즘적인 시를 썼으며, 시집으로 '청룡', 유고집 '이한직 시집'이 있다.
위 시는 낙타를 보면서 늙은 은사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 그리고 시인의 어린 시절을 연상적 수법으로 회상한 작품이다. 낙타는 늙은 선생님을, 그 선생님은 어린 시절을, 이어서 동물원에 갇힌 현대인들을 떠오르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덧 낙타를 닮은 선생님처럼 늙어가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선생님의 회초리에 있다. 이한직의 부친은 중추원 참의와 경상북도 학무국장 등을 지낸 친일파의 거두였는데, 이한직은 술만 마시면 '나는 친일파'라고 입버릇처럼 자책했다고 전한다. '시를 쓰기에는 너무 정직하고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는 평처럼 그는 진실한 시인이 아니었을까. 변장술에 능하고 지저분한 우리 현대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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