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변중선 선진의 공적

▲ 선산 변중선 선진은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하는 등 교단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
일생 교육사업에 헌신
독립투사로서
첫 전무출신 서원
원불교 100주년 기념으로
재평가 필요

선산 변중선(禪山 邊衆船 1903~1980) 선진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유공자(관리번호-1251, 훈격-애국장, 포상-1990)이기도 한 보기드문 선진이며 원불교 교단에 남겨준 공적 또한 매우 큰 어른이다. 필자가 선산 변중선 선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생전에 정산종사를 뵙게 된 기연과 뒤늦게 전무출신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현재 영모원의 일반 전무출신 묘역에 모셔져 있어서 아쉬워하고 있던 차 혁타원 송예성 종사와 신타원 김혜성 종사의 열반인 약력 보고를 듣던 중 양가의 가족들이 원불교 교도가 된 것은 바로 선산 선진의 공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작년과 금년 초에 교정원 총무부에 선산 선진이 교단에 남기신 공적을 재평가함이 좋겠다는 의견서를 제출했고, 일반인들이 널리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사회에 끼친 공적

선산 선진은 전남 장성군 북일면 월계리에서 부친 변복연과 모친 유유덕의 7남매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2세가 되던 1914년에 전북 부안군 계화도에서 당시 명망있는 한학자이던 전우(田愚) 선생문하에서 17세 되던 1919년까지 한학을 통한 학문을 닦았다. 17세 되던 해인 1919년, 3·1독립만세 사건이 발발하자 계화도에서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가 백남규가 운영하던 한성강습원에 입학해 수개월간 공부했고 신학문을 끝까지 반대하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내려온 후 구례의 천은사(泉隱寺)로 들어가 3개월가량 마음을 달랠 겸 불경(佛經)을 읽으며 수도생활을 했다. 그 후 부모의 허락을 받고 상경해 중동고보에 입학했고 몇 개월 후 다시 휘문고보 2학년 편입시험을 치른 후 휘문고보를 다녔다. 이때 특별한 계기를 만나 20세가 되던 해 불교단체의 장학금을 받고 중국 상해로 유학의 길을 떠나 동제대학 부속중학교 수학을 거쳐 1926년 9월 1일 동일계열인 동제대학 의학부에 진학하여 산부인과를 전공했다.

이때 항일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국에서 일어난 배영운동(排英運動)인 5·30운동에 가담하면서부터였다. 재중 유학생 3백 명을 규합하여 배일(排日) 독립단체인 '해외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상임위원장이 되었고, 임시정부 산하의 대의원인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가 되었다. 의정원생활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대통령에 이승만, 대통령 밑의 내무부장에 신규식, 경무국장에 김구가 있었다. 대의사였던 선산 선진은 재중 청년동맹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했으며 선거에 의해 중앙집행위원장에 뽑혔고 좌·우익이 아닌 중도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때 일경에 체포되어 일본 선박에 실려 나가사끼로 갔다가 부산을 경유하여 열차편으로 신의주에 압송되어 신의주 감옥에 피감됐다. 여기에서 미결수로 거의 1년간을 보내고 평양감옥에서 6개월간을 미결수로 있다가 1년9개월 만인 1929년에 3년형을 언도받았다. 형을 마친 후인 1932년에 고향으로 내려와 친구들의 권유로 금광채굴사업을 하기도 했고, 사업을 정리한 후 무등산(전남 화순군 이서면 쪽)에다 집을 짓고 장성 고향에 있는 전 가족을 데려왔고, 한약방을 차려서 10여살 때부터 배우고 익힌 한방과 침술로 가족의 생계를 해결했다.

해방이 되던 1945년, 상경하여 동지들을 규합, 중도파적인 '민의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나 좌우 대립의 와중에서 회의와 한계를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와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전남 화순군 이서면에 사재를 털어 사무실과 숙직실을 갖춘 7간의 이서 북국민학교를 설립했고, 3천여 평의 논을 희사하고 후원회장을 맡았다. 그 후 서울정치대(건국대학교 전신)와 이리농대에서 강의를 하였고 이어서 전남대 농대에서 후진교육을 계속했으며 1968년 정년퇴직을 한 후 일생을 통하여 중요하고 가장 인연이 깊은 원불교에 몸담기로 작정하고 원불교총부로 올라왔다.

교단에 끼친 공적

선산 선진은 원기50년(1965) 2월16일, 친구 부인인 이춘경 교도 연원으로 광주교당에서 입교한 후, 원기53년(1968) 1월1일 출가해 총부로 왔고, 원기53년 3월26일 제1회 법은회 창립총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원기56년까지 의장직을 수행했고, 원기56년도에 법은재단으로 명칭이 개칭된 법은재단의 이사장을 원기58년(1973)까지 역임해 재단의 발전에 기여했다. 원기60년(1975)년 6월2일에는 공익부 산하에 원광한의원을 설치하기 위한 '원광한의원운영위원회'가 열려 선산 선진을 원장으로 추대해 원광한의원을 개원하기로 하고 준비를 거쳐 동년 10월19일 개원된 원광한의원의 초대 원장을 원기61년(1976)년 2월28일까지 역임했다.

원기54년(1969) 3월2일부터 원기61년(1976) 3월2일까지 원광대학교 교수로 임용(독어·문화사 강의)되는 동안 한의과대학 설치를 추진하여 승인을 받도록 도왔으며, 원기58년(19 73) 3월1일~원기59년(1974) 2월28일까지 한의과대학 초대 예과과장, 원기59년(1974) 3월1일~원기61년(1976) 2월29일까지 한의과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하며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이러한 선산 선진의 원불교와의 첫 인연은 6·25 때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상면하게 된 정산종사와의 기연에서 비롯됐다. 〈한울안 한이치에〉 제1편 법문과 일화에 의하면 변중선 선진이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도보로 피난오면서 총부에 들러 정산종사를 뵈옵고 사뢰었다.

"이리에서 자고 삼례와 전주를 거쳐 광주로 가야겠습니다." "이리에서는 못 자고 삼례 가서 자게 될 것이며, 광주로는 못 가고, 장수가서 피난하겠는데 그러면 괜찮겠다." 이렇게 말씀하고 새말(新洞)까지 전송하면서 또 말씀하셨다. "앞으로 와서 살 곳이니 착실히, 두루 살펴보고 가라."

변중선 선진은 그 때 이리에서는 친구가 없어 못 자고, 삼례 가서 자게 되었으며, 이북의 장갑차가 전주를 거쳐 광주로 가는지라 광주로는 못 가고 장수로 가서 피난을 하고 후에 전무출신을 하게 됐다. 이러한 사연으로 정산종사의 말씀을 잊지 못하고 있던 선산 선진은 광주에서 불교신도 모임인 선우회에 참여했다.

어느날 회장인 송하식(혁타원 부친) 선생에게 이리에 있는 원불교에 한번 다녀오자고 하여 함께 와서 정산종사를 뵈었다. 정산종사를 뵙고 깊이 감명을 받은 송하식 선생은 자녀들에게 해준 이야기와 이러한 인연으로 혁타원 종사와 신타원 종사를 비롯한 삼성 일가가 원불교 교도가 되어 교단역사에 남을 공부와 사업을 전개한 사실은 두 분의 〈법훈록〉에 잘 나타나 있다.

〈대산종사법어〉3집 제6편 공도(公道)에 의하면, 원기65년 3월25일 대산종사께서는 선산 선진의 열반 소식을 들은 후 "이분은 독립투사로서 이 나라에 공헌도 많이 했을 뿐 아니라 노년에는 '칠보가 보물이 아니라 자기 생사를 해탈하는 것이 참으로 귀한 보물(七寶非眞寶 解脫是眞寶)이라'는 자각에서 재색명리를 다 던지고 출가하였으니 그 때 이미 항마로 출가하였다. 독립투사로 이 교단에 전무출신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 기록하여 전하도록 하라"는 법문을 내렸다. 이와 같은 선산 변중선 선진의 공적을 볼 때 교단 100주년을 맞아 그 공부와 사업성적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