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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남열 원로교무 4 / 교도, 순교한 만큼 응하는 이치
임남열 원로교무 4 / 교도, 순교한 만큼 응하는 이치
  • 정리=이성심 기자
  • 승인 2015.05.08
  • 호수 17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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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대불공
병마를 극복한 나와 부교무는 다시 열심히 교화에 임했다. 법타원 김이현 교화부장과 손정윤 교무가 교당에서 교리강습을 할 때면 시간을 맡아 줬다.

법타원님은 "강습회에 교도들이 많이 오고 안 오고는 첫날은 교무 책임, 둘째 날은 강사책임이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순교했다. 구두 굽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90명이 넘는 사람이 와서 강습회는 성황을 이뤘다. 사상지역에서도 10여 명이 왔다. 교당 땅 희사의 의지도 보여 열심히 했다. 하지만 교당을 새로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상교도는 "약속을 어겨서는 안된다"며 2층 가정집을 희사해 사상교당 교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어느덧 7년 세월이 흘러 인사 이동서를 냈다. 의정부교당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의정부는 교통도 불편하고 전방이 가까운 곳이라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교당은 조그마한 가정집에다 법당을 만들었다. 교도는 7~8명. 교도회장은 형제들과 합작으로 사놓은 산에 목장을 하고 백한명 주무는 벌꿀재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종로교당을 자주 갔다. 법타원님이 종로교당으로 다시 부임해 내게 의지가 됐다. 당시 교당은 비가 오면 법당 한가운데가 줄줄 새고, 부엌에는 연탄 냄새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름이면 집이 너무 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라 낮에는 책 한권을 들고 수락산 계곡에 가서 해가 지면 돌아왔다. 그러다가 '내가 마음을 챙겨야겠구나'하고 교당 다니다가 멈춘 교도들을 찾아 나섰다. 물어서 찾아가면 검정치마만 보면 돌아앉는 교도가 있었다. 내가 순교를 가면 뒤돌아 앉아서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는 오지 말라는 것이다. 동행한 교도는 기가 막혀서 "교무님 가십시다" 하고 나를 데리고 나왔다. '얼마나 마음이 상했으면 그렇게 할까 마음이 안됐다' 싶어서 '내가 대신 사과한다'고 갈 때마다 달랬다. 나중에는 교도가 "미안하고 부끄럽다"면서 서서히 마음을 풀었다.

또 다른 남자교도를 찾아갔다. 과거에는 교리도 차트를 그가 붓으로 만들어 전국교당에 전해졌다. 그 교도는 대서소를 운영했고 교당 초기에는 교도회장까지 한 분이다. 나는 또 빌었다. "일찍이 의정부 골짜기에 맨 먼저 대종사님 법을 알아보시고 다녔는데 대종사님이 계시면 얼마나 칭찬하시겠느냐"며 "한 마음 돌려서 교당에 나오시면 다른 분들도 나오실 터니 큰 복을 받을 것이다"고 하면서 순교를 다녔다. 다행히 조금씩 풀려서 결국에는 나오게 됐다.

당시 의정부에 전주교당에서 청년회 때 만난 강덕준(현 강동교당) 교도가 농협으로 이동되어 왔다. 강 교도 남매를 시작으로 어린이법회가 진행됐다. 또 부부법회도 결성됐다. 교당이 어려울 때 거의 1년이 넘도록 식사를 챙기는 등 강 교도의 공덕을 잊을 수가 없다.

3년 살면서 40여 명 교도로 늘어나고 동두천에서도 유능한 분이 법회에 참석해 출장법회도 몇 번 보았다. 교도회장은 장차 동두천에도 교당을 낼 계획을 갖고 있었다. 교도회장은 어머니 열반기념으로 교당 수리를 깨끗하게 했다. 교화가 그렇게 활기를 띠는데 내게 또다시 마장이 찾아왔다. 척추결핵 판독을 받은 것이다. 약을 먹고 나면 천장이 빙빙 돌았다.

교도회장은 나만 보면 "교무님 이제 뭔가 좀 되겠지요"하며 기뻐했는데 실망을 안겨드렸으니…. 교도회장은 내게 "가시지 말고 문간방에서 치료하면서 법회 때만 나오시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요양원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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