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복원된 용암교당 전경. 광타원 노청신행 교도의 오롯한 신앙을 되새겼다.

용암교당은 경남 지역에 일원대도가 처음으로 전해진 전법교화의 성지다. 여기에 광타원 노청신행이라는 특별한 주인공이 있다. 초기 교단사가 다 그러하지만 용암의 전법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벅찬 감동 그 자체다.

구한 말 남원 수지의 죽산 박씨 가문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 한 이가 있었는데 상산 박장식 종사의 부친인 박해창이였다. 이 때 진주 용암의 해주 정씨 가문에서도 동문 급제하여 함께 고종 임금을 모시고 근무한 이가 정홍석(노청신행 부군)이다.

그런데 궐내에 두 사람의 불화 소문이 퍼지자 임금이 이를 듣고 특별히 만찬에 초대하였다. 만찬이 무르익자 고종 임금은 화해를 위해 박해창의 큰아들 영산 박영식 대봉도와 정홍석의 외동딸 적타원 정봉숙 정사(곤타원 박제권 종사 모친)를 혼인시킬 것을 즉석에서 제안했다. 임금의 중매였지만 사실 어명인지라 지체없이 혼인이 성사되고 두 집안은 사돈사이가 되었다.

이때 박씨 가문은 정형섭(박영식·박장식의 모친) 교도를 중심으로 대종사께 이미 귀의하여 정법에 심취해 있었다. 노청신행은 가끔 시집간 외동딸이 보고 싶으면 사돈댁을 찾아 왕래가 잦았다. 하루는 딸의 집을 갔는데 사돈이 안 계셔서 그 연유를 묻자 '솜리에 생불님이 계셔서 뵈우러 갔다'고 말했다.

노청신행이 훗날 다시 딸네 집을 찾아 사돈인 정형섭에게 따져 묻듯 '그런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해야지, 나도 생불님을 뵈울 수 있도록 해 달라'며 강압적인 청을 했다. 정형섭은 마지못한 것처럼 원기20년(1935) 노청신행과 함께 익산 총부를 찾아 한 달간 하선(夏禪)에 참여했다. 하선이 파한 후 선객들과 함께 대종사를 모시고 다과회가 열린 자리에서 대종사께서 노청신행에게 소감을 물었다.

노청신행이 환하게 웃으며 '극락에 온 것처럼 좋습니다'하고 답하자 대종사께서 '내년에도 또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노청신행이 당돌하게도 "대종사님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용암에서 솜리가 얼마나 먼 길인데 내년에 또 오라고 하십니까. 그러지 말고 대종사께서 우리 동네를 한 번 다녀가시면 좋겠습니다"'말했다. 별명이 노판사인 노청신행의 당당함과 활달한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청신행의 거침없는 제안에 대종사께서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그렇다면 내가 한 번 내려가지요"하고 즉석에서 약속을 하게 된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간단한 몇 마디의 문답이었지만 추론컨대 전생으로부터의 숙연이자 깊은 약속이었을 것이다.

선방이 파한 후 노청신행이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 정결한 곳에 법신불일원상을 모셔놓고 지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노청신행은 아들이 없어 작은집에서 양자를 들였는데 양아들 정태구가 어머니의 지성스러운 신앙에 감동하여 동네 입구에 4칸의 집을 지어 올렸다. 신앙으로 아들을 감동시킨 어머니나 어머니에게 감동을 받아 조건없이 교당을 지어 올린 아들이나 사없는 청정심은 매 일반이었다. 마치 대종사께서 9인선진과 더불어 사무여한의 기도로 법계 인증을 받음과 같았다.

▲ 원기36년(1951) 제1대 유공인 사진첩에 나온 용암교당 교도들.(경남 진양군 이반성면 용암리)


이로써 박사시화의 증참아래 첫 법회가 열렸고 마침내 원기25년 3월 용암선교소로 인가를 받아 초대 순교로 노삼구화가 부임했다. 이후로 권우연, 정안심행, 정진숙, 오종태, 이지일 교무 등 기라성같은 선진들이 교무로 부임해 용암 교화를 주재했다. 이후 교화가 번성해 마침내 원기43년에 용암지부로 승격하기에 이른다.

해주 정씨 양반골 용암에 일원대도가 전해지면서 이 마을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노청신행 자체의 변화였다. 호랑이라고 소문난 그가 아랫사람들을 따뜻하게 살피고 챙기는 자애스런 마님으로 변했다. 예회 날이면 동네가 잔칫날 같았다. 특히 하인들이나 아녀자들은 이날이 유일하게 고단한 심신을 추스르는 휴식일이자 해방일이었다.

정양운(노청신행의 조카, 원남교당) 교도에 의하면 '예회 날이 되면 마치 명절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설레고 동네 분위기가 명랑했다'고 회고한다. 대종사께서는 노청신행과의 약속을 지켜 원기25년 경전선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가는 길에 십리 근처의 평촌역에서 내려 용암교당을 방문하고 그 신행을 격려했다. 평촌역에 내린 대종사께서 앞에 다섯 봉우리의 산(오봉산)을 보고 '앞으로 이곳에서 다섯의 보살이 나올 것'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훗날 심익순 등 다섯의 전무출신이 나왔다. 심익순의 어머니 김순시화는 여자로서 사서(四書)를 읽는 등 영대가 밝은 분이었는데 당시 〈불교정전〉을 접하고는 이야말로 '미래의 불교요 정법이다' 하고 곧바로 귀의하여 노청신행을 도왔다.

대종사께서 용암에 하루를 머무는 동안 교당에는 마땅히 유할 곳이 없어 노청신행의 사가에 주무셨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집은 수년전 철거돼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집이 보존될 수 있었다면 남원 수지의 몽심재와 더불어 초기 교단사에 양반사회의 몇 안 되는 교화의 살아있는 자취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정형섭은 막내딸 두타원 박효진 종사(보산 고문국 종사의 형수)를 창평 고씨 집안에 시집 보내 남원의 죽산 박씨와 용암의 해주 정씨와 창평의 창평 고씨 가문은 대종사 당시 귀의한 대표적인 향반(鄕班)이다. 남원과 용암, 창평에 걸쳐있는 반가(班家)의 교화사례는 훗날 더 정교한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대종사 열반 후 정산종사께서 부산을 가셨다가 총부로 귀관하시는 길에 용암교당을 방문하셨다고 전해지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정확한 날짜의 기록이 없다. 다만 "용암은 장차 진주 등지로 법을 전하는 못자리 판이 될 것이다"고 하셨다는데 해주 정씨 인연들이 과연 진주와 합천을 비롯한 경남 일원의 곳곳에 법을 전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노청신행이 열반하자 총부에서는 장의위원회를 열고 김대거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여 발인으로부터 종재를 주관하도록 했다.

거룩하여라! 용암의 전법역사여! 광타원 노청신행 선진이시여! 원불교 100년을 맞아 경남교구에서는 경남지역의 전법교화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경남 새로운 교화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옛 용암교당을 원형 복원하고 전법과정의 거룩한 이야기를 작은 기념비에 담았다. 지난 10일, 좌산 이광정 상사를 모시고 1천여 명의 교도들이 운집해 노청신행의 오롯한 믿음을 되새기고 그 공덕을 찬양하는 대법회를 봉행했다.

원불교 개교 100년, 경남 전법 80년을 당해 교화대불공의 도약을 다짐하는 뜻 깊은 법잔치였다.

<경남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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