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말기의 교단 수난과 그 극복
독자기고

▲ 원기28년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영결식. 정산종사가 고백문 독배를 하고 있다.
▲ 소태산 대종사 49재 종재식 불단의 모습.
6월은 추모와 회향의 달이다. 원기28년(1943) 6월1일, 교조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에 들었는데, 사회적으로는 6일을 현충일로 호국영령들을 기리고 있으니 말이다. 종교의 본질을 뉘우침과 닮아감으로 본다면, 교조의 열반처럼 극절한 때는 없을 것이다.

정산종사는 대종사 성비명(聖碑銘)에서 열반 당시의 상황을 "때에 도중(徒衆)들은 반호벽용(攀號擗踊)하여 그칠 줄 몰랐고 일반사회의 차탄(嗟歎)하는 소리 연하여 마지 아니했으며 허공법계와 삼라만상이 오열하는 기상을 보이었다"라고 표현하였다. 반호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여 붙잡고 울부짖는 모양이고, 벽용이란 가슴을 치면서 훌떡훌떡 뛰는 형상이며, 차탄이란 안타까워 끌끌 혀를 차는 모습이다. 이에 천지가 설움에 복받쳐 목메어 우는 기상을 그리고 있으니, 그 광경이 선연하게 드러난다.

열반 당시 대종사는 춘추 53세였다. 대중의 어느 누구도 이렇게 일찍 열반에 들 것을 예감하지 못하였다. 다만 교단 해체를 획책하던 일제강점기에 갖은 수난을 함께 겪은 친견제자들은 대종사의 "나를 인도의 간디로 비하여 탄압을 가중하니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물기 어렵겠노라. 내가 먼 곳으로 수양을 갔다 와야겠다"는 말씀을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가셨다'고 풀이한다. 대종사의 열반으로 교단이 해체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는 말이다.

대종사의 대각(1916)으로 비롯되는 원불교의 창립과 민중구제의 활동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전개된다. 일제는 경술국치(1910)와 함께 무단통치 아래 종교 공인(公認)주의를 실시하여, 불교·신도·그리스도교를 공인종교로 문부성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모든 종교를 종교유사단체 곧 유사종교로 구분하여 법무성 경찰국에서 단속했다. 물론 불교 등 한국의 종교단체에는 법인을 허가해주지 않아 기부행위 등이 불가능했지만, 새로운 종교활동은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3.1독립운동(1919)이 일어나면서 문화정치로 통치스타일이 바뀌어 집회 허가 등이 일부 인정되는 가운데, 원불교도 창립총회(1924)로 교단공개가 가능하게 되었다. 만주사변(1931)을 일으킨 일본이 한국을 병참기지 삼아 중일전쟁(1935) 등을 벌여가는 것과 비례하여 민생의 고통도 증가하였다. 1936년 신자 2백만명을 자랑하던 차경석의 보천교(普天敎)와 조철제의 무극교(無極敎)를 해체하는데 이르면서 교단의 유지 자체가 지상의 과제가 된다. 교단에서 1935년, 익산성지의 대각전 건립과 법신불일원상 봉안, 〈조선불교혁신론〉 〈예전〉 〈회원수지〉 발행 등은 이러한 정세를 파악하고 기민하게 대처한 교단의 혜안과 역동성을 말해준다.

1939년 마령교무였던 구산 송벽조 대희사의 천황모독사건 등을 계기로 일제의 교단 감시가 철저해진다. 특히 경진동선(庚辰冬禪, 1940)에 이르면 입선인 46명 규모에 긴장한 당국은 정기훈련을 제재하기도 했다. 기관지인 〈회보〉가 폐간된 것도 이 때이다. 이듬해(1941) 12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당시는 전시체제 아래였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이나 한국어사용 금지 등으로 대표되는 위협에다 교단의 존재를 말살하려는 수단이 강구되고 있었다. 대종사가 경진년 9월, 기본경전인 〈정전〉편수를 명한 것은 이러한 사태를 조망한 일이다.

그런 가운데 대종사의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받은 대중들은 굶주림 속의 주경야독(晝耕夜讀)을 극락생활로 알며, 법열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정전〉은 편수를 마쳤으나 전라북도는 황도(皇道)사상의 부재를 들어 불허한다. 다행히 불교시보사의 김태흡 사장의 협조로, 1943년에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불교정전〉이라는 이름으로 발행한다. 대종사가 "나의 일생 포부와 경륜이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다"(〈대종경〉부촉품 3)고 밝혔으니, 그 간절했던 상황이 잘 드러난다.

대종사의 법설을 상기하면서 친견제자들은 "무슨 법문을 하시든지 결론에 이르면 일원상, 사은사요, 삼학팔조로 매듭을 지으신다"고 하는 것은 당시 일원상 교의의 체계화를 상징하는 말이다. 대종사는 5월16일 예회에서 생사법문(生死法門)을 베풀고 병환을 보인다.(〈대종경〉 부촉품 14) 〈원불교교사〉를 비롯하여 대종사 만년의 모습이 다양하게 전하고 있는데, 이공주 종사의 〈일기〉(일어)는 원형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일기〉는 16일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비. 종사주(대종사) 중태. 예회에 (생사대사에 관한) 법설이 계셨고, 전음광씨 시국담, 김해김씨 시국담이 있었다. 대종사 왼쪽 가슴이 아파 창백하셨다. (이리 삼산병원장) 김병수씨, (한의원) 오정학씨 (진찰을 하고) 또 뇌빈혈 체기(가 있다고 하며), 밤은 고민중에 보냈다." 20~21일에 조금 나아졌고, 26일 중태여서 27일 이의원(이리의원)에 입원하였으며, 28~30일 조금 좋았고, 31일 위중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6월1일은 "3시경 종사주 별세라고 한다. 급히 병원에 갔더니 사실(이었다). 울었다. 버스로 오면서 울음바다가 되었다. 종사주, 조실안착. 슬프다. 밤은 선방에 있었다."

〈일기〉에는 6일 발인식, 그리고 7일 정산종사의 종법사 취임식 정경까지 고스란히 전한다. 그런데 일인 경찰관들의 이야기가 대종사의 환후 중에는 물론 열반 후에도 나타난다. "이제 지도자를 잃었으니 (원불교는) 자중지란이 일어나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스승을 잃고 비통해 하는 교단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형국에 다름이 아니다. 중앙총부 구내에 주재소를 설치하고 행여 독립운동이라도 일어날까 주야로 감시하던 그들이다. 그래서 일원상을 모신 교단을 예고없이 방문하여 "귀교의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대종사는 농기구를 메고 돌아온 산업부원들을 향해 "저들이 우리의 부처"(〈대종경〉성리품 29)라는 선어(禪語)로 답하고, 교리에 사은(천지·부모·동포·법률)만을 말하고 천황은(天皇恩)이 없는 것을 트집잡을 때 '황은(皇恩)·불은(佛恩)'의 양 대은(兩大恩)을 말하여 교단해체의 위기를 모면했던 바이다.

일제말기의 탄압은 교단에 한정한 것만은 아니지만, 주야로 계속되어 살얼음판을 걷는 심경을 이해하게 한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불온(不穩)사상으로 부르는 독립운동, 남녀문제, 금전갈취 등이었는데 많은 종교가 실제로 비행을 저질러 사회적인 지탄을 받아왔다. 오늘날 총부를 비롯하여 각 교당의 법회에 남녀가 구분해서 앉는 전통이 이때 형성된 것이다. 오누이간의 대화라도 제3자를 대동하여 오해가 없도록 하고, 총부에서 식사하는 일인 형사에게 전표를 내밀며, 주재소에 보낸 기관지 대금을 청구하는 당당함을 교단역사는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간직하게 되었다.

대종사의 열반 후 일제가 교단에 대해서 다소 방심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에는 정산종사를 따른 교단의 시국정세에 대한 열린 안목이 있었다. 정산종사가 중앙총부를 비우고 주로 지방을 돌면서 교화에 주력하였는데, 열차 안에서 광복(1945)소식을 들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면서도 정산종사는 〈건국론〉 (1945.10)을 준비하고 있다. 대종사 법설이 그러하듯이 정산종사의 법설에도 일인들에 대한 원망의 감정은 없다. 열반도 가르침의 방편일진대, 대종사의 열반은 탄압과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지혜를 오늘에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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