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24

원기31년 원평교당에서 어머니 최형진옥의 연원으로 입교한 효타원 김법진(孝陀圓 金法眞) 원로교무.

원기29년부터 어머니의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원평교당을 오갔다. 원평교당이 금산리로 이사한 후에는 통사동 집에서 5km였다. 멀었지만 학교가 끝나면 거의 교당에 다녀오는 것이 일과였다. 당시 어머니의 신심과 정성은 말 그대로 '지극'했다.

교당이 멀어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출장법회를 보면 좋겠다"고 교무님께 말씀드렸다. 교무님은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60호나 되는 큰 마을 어른들에게 대종사님 정법을 전해 줄 기연이 된 것이다.

설산 김병철, 윤타원 이정만 두 선진님이 교대로 출장, 야회법회를 월 2회씩 오갔다. 법회를 진행하다가 장소가 협소하여 동내 모종을 빌려 법회를 봤다.

모종도 장소가 작아져 집터를 마련하고 목재와 약간의 기금을 마련하여 공사를 시작했다. 목수일이 끝나고 초벽이 끝나고 재벽에 들어가고 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을 겪는 동안 금산리에서 원평으로 교당이 옮겨진다는 소문이 돌자 출장법회는 중단됐다.
법회는 중단되었지만 나는 교무님들이 오실 적마다 심부름도 해드리면서 교무님들 설법을 듣는 재미가 있었다. 어찌나 즐겁던지 원기35년 가을 내 나이 17살 때부터 원평교당에서 생활했다.

대산종사께서(당시 호칭은 대거 선생님) 모악산에 가시어 하수오를 캐오면 씻어드리고 식당일도 도우며 청소도 하면서 즐겁게 살았다.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님께서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시고 "너희는 한산, 습득(홍인대사 문하 공양주) 스님네들 같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칭찬 속에서 살았다. 해가 바뀌어 이정만 선진님은 총부로 가시고 효타원 양혜련 선진님이 오시었다.

교무님께서 "너는 이리교당으로 가야겠다"고 하시며 데려다 주신 것이 출가의 시작이고 나의 출가 연원교무님이 되었다.

2년 간사 근무는 내 인생에 있어 한 획을 그었다. 작은 보자기에 옷 몇 가지 싸서 가슴에 안고 이리교당에 들어갔다. 서공남 교무님께 인사를 드리고 내가 할 일터를 둘러보니 법당도 좋고 주방도 넓고 다 좋았다. 그런데 한 가지 제일 중요한 것이 생활하는 데 쓰는 물인데 식수는 물론 허드렛물도 없었다. 알아보니 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 대청소도 하고 세탁도 한다고 하신다. 뒷날에 들었지만 '물 길어 오는 일 때문에 사람이 들어오면 힘들어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다음 날부터 물지게를 감원 엄마인 김석일 씨가 내놓고 하시는 말씀이 "대타원 이인의화 할머니 댁에서 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하시며 "계단이 많으니 조심하거라" 라고 했다. 하루에 세 번씩 물을 기르게 되었고 4~5번 갈 때도 있었다. 그 시절 물지게를 지며 오가던 마흔 여덟 계단이 지금도 그 자리에 반은 남아 있다.

교당에 하숙하던 학생들과 철자집 배우는 재미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즐거웠다. 조석으로 심고 올리고 종두(종치는 일)를 맡아서 하게 되었다. 하루는 아침에 실수로 종을 치지 못했다.

교무님은 "우리 종소리를 듣고 음계의 많은 중생들을 일깨우고 이웃·가정에서도 하루 일을 시작한다. 오늘 네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으니 하루를 굶어야 하는데 아침 한 끼만 굶어라" 하셨다. 마음을 챙기지 못해 나는 아침을 굶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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