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산 송벽조 대희사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는 효심이 장하였다. 유학자로서 백행의 근본인 효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구산은 참으로 착한 아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소와 송성흠(韶窩 宋性欽)이 나이 41세에 상처를 하고도 독자(獨子)인 아들을 위해 재취(再娶)를 하지 않고 혼자 아들을 키웠고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구산이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송성흠은 정이 많아 굶주린 사람을 보면 집에 데리고 와서 밥을 먹였으며,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가 부엌에 쪼그리고 밥 먹던 일이 마음에 걸려 자부와 손부를 꼭 방에서 먹도록 배려, 남녀 차별 타파에 일찍이 개명했다. 또한 나이 71세에 큰 손자가 있는 영광으로 고향 성주를 떠나 이사를 올 때 기꺼이 자녀손들과 뜻을 함께 하였으니 말이다.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인 사미헌 장복추의 문인(門人)인 송훈동(薰動, 성흠의 법명)은 성주에 있을 때에도 친손자는 물론 소성동 일대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이었으며, 전라도에 와서도 함평 이씨 집성촌의 자제들에게 경서를 가르치며 지냈다. 76세에 길룡리로 들어와 살다가 열반에 들었다.

구산은 자신이 사기를 당해 재산을 잃어 늙은 부친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불효인지라 부친의 속옷을 아내나 며느리에게 맡기지 않고 보은강 방죽에 나가서 손수 빨아 입혀 드렸다. 이런저런 정황 중에 부친의 열반을 당한 구산 송벽조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 '애고 애고' 슬피 우는 구산에게 대종사, 위로의 말을 건넨다. "왜콩이고 조선콩이고 대강 우시오. 죽은 부친을 너무 슬퍼하지 말고, 후일에 13세 훈동이 도문에 들어오거들랑 그대의 부친인 줄 아시오." 구산의 '애고 애고' 우는 소리를 왜콩이라 표현하며 대종사는 슬픔 가운데 처해서도 유머로서 구산을 위로하는 영적 스승의 지혜를 가졌다. 먼 훗날 범산 이공전이 어린 나이에 전무출신을 하러 도문에 들어오니, 그가 바로 송훈동의 후신이라고 전해진다.

송성흠의 열반 소식을 늦게 접한 경상도 성주 종친이 편지를 보내 왔다. 조문을 보낸 사람은 송벽조의 친구인 유학자 앙산 송홍눌(仰山 宋鴻訥)로서 필자의 증조부이다. 한문으로 된 조문을 번역하면 "애도합니다. 우리 집안 할아버지. 우리 종문의 3백여명이 우러르던 그 풍채. 삼가고 조심함이 공의 부자(父子) 같은 분이 누구이오니까. 영광 삼백리 소식이 없더니 생사 소식마저 두절되어 서로 알지 못하였구려."

구산 송벽조가 출가할 때가 되었다. 진작 두 아들의 뒤를 이어 전무출신을 하고 싶었지만 노혼한 부친을 두고 출가할 수 없었다. 부친이 열반하자, 출가를 단행했다. 원기 9년(1924) 당시 나이 49세였다. 영광지부(현 영산성지 일대) 초대교무의 직무를 맡아 진안 마령지부 교무로 이동하기까지 13년 동안 영산성지에 살면서 주민 교화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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