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도약으로 이룬 대한민국 최고의 명창

한복과 부채를 내려놓은 정수인 교도(여의도교당, 35)의 얼굴은 맑았다. 무대에서 세상을 울리고 웃기는 명창의 카리스마보다는 조근조근 즐거운 친구같은 만남, 더 높은 자리일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줬다. 6월1일,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 대통령상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명창으로 자리매김한 정수인 교도. 41년 역사의 전주대사습은 소리꾼들에게 최고의 영예인 대회로, 그는 작년 차하(3등상)에 이은 두 번째 도전에 장원을 차지했다.

"작년에는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었고, 잘해야겠다는 부담이 컸거든요. 그러다 올해 결선에 올랐는데 가장 피하고 싶던 1번을 뽑았어요. '아, 마음 비워야겠구나'하며 그냥 있는 대로만 표현하자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장원 예상을 못했지요."

이제는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는 대회 전날까지도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조건을 상상하며 긴장했다. 숱한 무대나 대회에 섰지만 전주대사습의 부담은 확실히 달랐다. 장원이 확정되는 순간 한없이 울었던 그, 늦은 나이에 시작해 소리꾼으로 살아온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서울대에서 공부도 하고 수업도 하며 새롭게 알고 가르치는 보람으로 살아왔어요. 그러다 2011년에 '내 소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수소문 끝에 선생님들이 많이 찾으셨던 구례 연기암에 산공부를 하러 들어갔죠."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처럼 짐을 꾸려 산으로 향했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제2의 도약, 허나 문명을 끊고 종일 산을 향해 소리를 거듭해야 하는 오랜만의 산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그때 가장 큰 힘이 되준 분이 아버지(원광대학교 교수 정성철 도무)였어요. 마침 학교방학 중이었던 아버지가 한 밤에 산 한가운데 저를 놔두고 1시간 후에 데리러 온다고 떠나셨죠. 불빛도 없는 깜깜한 산속에서 담력도 키우고 깊은 고독도 느껴보라고요."

득음으로 가는 길, 아버지는 스승이었다. 심청가를 더 잘 부르기 위해 아버지의 눈을 가린 채 산을 다녔고, 반대로 그가 눈을 가린 채 살아보기도 했다. 고향 고창에서 배를 빌려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배 끝에서 인당수를 앞둔 심청의 기분을 느낄 때도 아버지가 곁에 있었다. 그렇게 한 달, 어느 새벽에 그는 자신의 소리가 달라졌음을 알았다.

"내가 내 목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학창시절부터 스승님을 모방하고 그 틀에서 노래했다면, 그때부터는 내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어요."


초심으로 돌아가 산공부로 자신의 소리 찾아

원불교국악문화 일조하고 픈 바람


그해 임방울국악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다시 관객 앞에 선 그는 산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한 달이면 두세 번씩, 단 사나흘이라도 연기암에 올랐다. "새소리 바람소리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새벽3시에 일어나 귀를 열어요. 산에서는 작은 새부터 지저귀면서 해가 뜨고 아침이 오더라고요. 자연스러운 우주의 소리를 내고 싶다는 생각에 아주 작은 소리에도 귀기울였죠."

타고난 목이 수리성(쉰 듯하면서도 단단하고 맑은 소리)이라 늘 기대를 한 몸에 받아온 정수인 명창. 이제는 자신의 소리를 찾아가는 한편 판소리의 현대화와 대중화, 세계화에 기여하는 것이 꿈이다. 또한 한 길로 달려오며 미뤄뒀던 결혼에 대한 생각도 이제 든다는 그다. 결혼이나 아이, 가정의 감정을 직접 느껴 더욱 성숙한 소리를 내고 싶다는 것. 그래서 흔히 소리꾼의 전성기는 삶의 희로애락을 어느 정도 겪고 난 40~50대다.

"장원이 되던 날이 원기100년 육일대재 일이라 더욱 기뻤다"는 그는 교단의 음악문화에 대한 서원도 늘 마음에 품고 산다. 개신교에서 국악찬양예배를 열고, 불교에서도 서둘러 국악찬불가를 만들어 내는 이때, 국악과 가장 잘 어우러지는 원불교의 노력이 조금은 아쉽다는 그다.

"우리 교단에 훌륭한 국악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함께 국악성가를 창작해 널리 알리면 교화에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소리꾼은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사람인만큼, 일원상서원문이나 법문을 쉽고 감동적으로 전하는 데 제 소리가 쓰이는 것도 신앙인으로서의 소망이고요."

교단 행사 대부분을 봉사로 공연하는 그는 원불교100년성업회, 큰울림앙상블과 함께 교화현장을 찾은 적도 여러 번이다. 공부나 강의보다도 관객들과 호흡하는 무대를 좋아하는 그는 "더 많은 재가 출가교도들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에 바쁜 중에도 교단 일이 우선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점점 와닿는 스승님 말씀이 있어요. 무대에서 '내 소리를 들어봐'라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가장 바닥에서 '제 소리를 들어줘서 고맙습니다'라는 마음이어야 해요. 누군가 들어주는 것에 감사하며, 그 자리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죠."

교단의 젊은 소리꾼에서 이제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명창이 된 정수인 교도. 최고의 자리에서도 늘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 노력하는 한편,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는 소탈함도 함께 느껴진다. 논밭의 벼가 잘 여문만큼 고개를 숙이는 겸손, 그는 풍년까지의 먼 길을 차근히 걷고 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