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25

동산선원에서 공부하던 시절은 내게 마냥 즐거웠었다.

나는 전무출신 지망자가 나타날 때처럼 기쁜 일이 없었다. 많이 행복했다. 그래서 후진 양성에도 늘 정성을 다했다. 총부 근무 당시 알게 된 후진을 야간 중등과정을 밟도록 주선하여 졸업시켰다.

후진들이 교화현장에서 큰 일하는 모습이 자랑스럽다. 이렇게 대견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행복이지 싶다. 교당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두 군데 교당에서 한 사람씩은 대종사님 제자로 인도하였으니 보람이라면 보람이고 기쁨이라 생각한다.

전북교구 흥덕교당 2대 교무로 발령 받아 가보니 교당 창립주인 송인흥 주무님과 한 방에 같이 생활해야 했다.

때마침 우체국이 새 청사를 마련하여 이사하게 됨에 이 기회를 포착하여 우체국 구청사를 창립주와 의논하여 창립주가 마련하여 놓은 기금과 교당에서 얼마를 더 합해서 우체국 건물을 인수했다. 구 건물을 사서 수리하고 법당의 면모를 갖추는데 청년들의 힘이 컸다.

흥덕교당 근무를 마치고 아영면 청계교당을 가니 울도 없고 담도 없는 것은 물론 방에 들어갈 때 마루가 없어서 돌을 딛고 드나들었다.

교당 문 앞을 내다보면 선술집이란 간판이 보였다. 법회에 참석하는 교도들도 아직은 신심이 투철하지는 못했다. 주무님이 있었는데 본인 생계도 힘들어했다.

고민 끝에 추운 지방이라 마늘 장사를 하면 왠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2년 동안 마늘 장사를 통해 법당수리 비용 약간을 마련하고 이웃교당에서 희사를 받은 금액을 합하여 법당을 깔끔하게 수리했다.

남은 금액으로 시멘트를 사서 청년들이 벽돌을 찍고 물주고 나르고 해서 담도 치고, 화장실도 만들었다. 벽에는 세면을 바르고 하얀 페인트도 칠했다. 밖에 문도 대문은 아니지만 밤에 잠그고 잘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리산 천왕봉 등산을 그간 집수리에 애쓴 심신에게 상을 주는 마음의 표시로 인월교당 식구들과 다녀왔다. 서로 결속도 다지고 내가 사는 6년 동안 땔감을 이 교도들이 준비해 줘 살았던 것이다.

남춘천교당에서는 일반·청년·학생·어린이법회를 운영 하는 중 천도재가 많았다.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재가 교도인 안재신 교도를 등용하여 학생법회를 담당하게 했다. 1년에 한 번씩은 대각개교일과 초파일을 기해서 교도훈련도 실시했다.

11월이면 4주간 금·토·일 1개월 동안 교리훈련을 했다. 마지막 주에는 교도들이 정말 기뻐하고 감상담도 했다. 교도회장님은 "종법사님 뵈러 가는 것도 격년마다 하지 말고, 매년 성지순례와 조실인사도 하자"고 의견을 낼 정도였다. 교도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법을 알아갈 때 교무로서 정말 큰 보람이었다.

오수교당에서는 일반·청년·학생·어린이 유치원이 있고 청년법회를 다니다 나이가 드니 주춤하고 있는 장년들이 있어 그 분들을 모아 원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했다.

당시 분재의 인연으로 교당을 드나들게 된 사람에게 교전을 드렸다. 그 분은 교전을 읽어보고 "입교하겠다"고 자청했다. 그의 법명은 총부에서 '원경'이라 지어 주었다.

그는 교전의 내용으로 공부하며 지역사회에서 엄청 많은 상장을 받아왔다. 나는 감당하기 어려워 어느 날 "종법사님께 인사드리러 갑시다"하고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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