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분열부터 카니슈카 왕의 4차 결집까지

불경의 2차 결집

2차 결집은 불멸 후 100년경인 기원전 3세기경에 개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인도의 테두리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성문화된 경전이 없다보니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역적 상황에 따라 초기의 엄격했던 계율도 조금씩 변질되고 있었다. 내용에 있어서도 기존의 엄격했던 교단과 새 지역의 개척 교단 사이에 계율을 가지고 논쟁이 벌어지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대략 10가지의 쟁점이 있었다.

그 주요한 내용으로는 수행자가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 되는데 정오를 지나 식사를 하는 문제,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코올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문제, 금이나 은을 보시 받는 문제 등이었다.

이런 일들이 당시 불교계에 논란이 되자 각지의 수행자 700여 명이 바이샬리 거리에 모여 논쟁을 하여 기존 계율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계율을 융통성 있게 해석하여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신생 관용파와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비구들 간의 논쟁에서 보수파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채택되어 10가지 쟁점 모두 법에 맞지 않는 '비사(非事)'로 판정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은 비구들이 모여 새로 대중부라는 파를 만들었는데 이를 '근본 분열'이라고 한다.

이렇게 갈라진 교단은 분열 후 200년(BC 280년) 경에 개혁적인 대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났고 보수적인 상좌부도 분열 후 300년(BC 180년) 경 재분열이 시작되어 20개 부파로 나뉘게 되는데 이들을 소승 20부라고도 하며 총칭하여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부른다. 이들은 각 부파별로 독자적인 이론 전개를 하며 인도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는데, 각자 불교를 정밀화·체계화시키며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하게 된다.

계율 해석차이, 분열시작

아소카왕 이룬 3차 결집

가장 위대한 평가받아


불경의 3차 대결집

BC 4세기경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왕의 북서 인도 침입을 계기로 서북 인도에는 마우리아 왕조가 나타났는데 BC 3세기 아소카왕 때 전성기를 맞았다. 아소카왕은 참혹한 살육이 벌어지는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불법에 귀의하여 불교를 국가 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그런데 BC 235년 그는 필생의 사업으로 부처 사후 구전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經)과 불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律)과 부파불교에서 수백 년간 연구되어 온 아비달마의 논(論)들을 한자리에 모아 경·율·논 3장(三藏)의 대장경을 편찬하였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라고 불리는 3차 대결집이다. 바로 이 경이 남방으로 흘러 들어가 남방 소승 경전의 전범인 팔리어 경전의 기초가 되는데 이때는 상좌부의 분열이 이루어지지 않고 힌두교가 정식으로 나타나기 전이라 비록 아비다르마 연구로 변질되기는 하였지만 부처의 원어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아소카왕 사후 마우리야 왕조는 붕괴되고 안드리아 왕국과 쿠샨왕조 같은 소국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마우리아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전통의 복귀를 주장하며 브라만 제도의 부활을 시도했다. 그들은 산스크리트 문법을 확립(BC 2세기)하여 바라문 문화를 대표하고 산스크리트 문화로 중앙 문화를 이끌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는 마누 법전을 제작(BC 1세기)하여 바라문의 권위를 세웠다.

불경의 제4차 결집

종교적인 면에서의 바라문교는 각 지방에 남아 있던 부족 신앙이나 민속 신앙을 베다 성전에 포괄하고 선진 종교인 불교 이론도 흡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원형을 이 시기에 정립했다. 힌두교의 정립은 기존 불교계에도 큰 충격을 주어 대중부 뿐만 아니라 상좌부도 분열하게 되는데, 힌두교 박티신앙의 영향으로 불교 속에도 부처를 신앙으로 하는 대승불교가 나타나게 된다.

마우리아왕조가 멸망한 이후 인도 북부에 생긴 중앙아시아 계통 쿠샨왕조의 카니시카왕은 예외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택하고 AD 125년 경 대대적인 4차 결집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700여 년에 걸친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논서를 가진 불교는 당시 위정자들에게 가장 차원 높은 고급 종교로서 인정받았으며 위정자들도 자신의 통치를 위해 불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니슈카왕은 부파불교 내에 여러 파가 있고 각 부파의 교의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고, 각 부파의 이설을 통일하고자 경·율·논 3장에 통달한 스님 500명을 선출하여 불전 결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4차 불전결집이다.

불경 4차 결집을 할 때는 각 부파의 학문적 논의가 거의 완성된 상황이라 기존 팔리어 삼장에다가 이들이 만들어 놓은 광범위한 주석을 덧붙여 대장경을 편찬했다. 경장주석 10만송, 율장주석 10만송, 논장주석 10만송, 도합 30만송의 대주석을 동판에 새겨 큰 보탑 속에 안치했다고 하는데 그 중 논장의 일부 주석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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