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삼동원으로 훈련을 다녀왔다. 이곳에서는 매시간 30분마다 종을 치는데 이때엔 모든 것을 멈추고 호흡에 집중하며 잠시 명상을 한다. 식사 시간은 물론이고 설법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루 중 정말 짧은 시간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참 나를 발견하고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수행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떠한가? 밥을 먹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앞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 순간 일심(깨어있기) 보다는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다가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가끔 TV에서 명상수행에 대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고요한 법당에서 두 눈을 감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입정에 든 모습을 나온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좌선을 조금이라도 해본사람은 알겠지만 처음의 편안함도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리는 끊어질 듯 저려오고, 잡념은 더욱 치성해진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혼침에 빠져 있기 쉽다. 그래서 수행은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통증과 생각들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부터가 수행의 시작이다.

사실 우리는 수행의 의미를 몰랐을 때부터 수행을 해왔다.
화가 날 때는 밀린 이불 빨래와 집안 대청소를 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풀려고 영화를 보거나 맛있는 것을 먹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도 한다.

운동이나 취미활동 역시 수행의 방법 중 하나다. 본능적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경계로부터 피하려는 피경의 수행법이다. 하지만 확실한 이치를 알지 못한 채 하게 되는 수행은 힘이 약하다. 빨래가 다 마르고 나면 다시 괴로워지는 것이다.

확실한 이치를 알아야 한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경계는 나의 문제며, 모든 것은 내가 짓고 받는 인과의 이치며, 경계 역시 진리의 양면(兩面)이라는 것에 토가 떨어져야 한다. 이것 역시 수행을 통해서 알아차릴 수 있다.

요즘 우리는 수많은 수행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염불과 좌선은 기본이고 행선, 위빠사나, 마음챙김 명상(MBSR)등….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빨래를 해도 좋고, 영화를 봐도 좋다. 개인의 특성에 따라 선택을 하자. 그래도 교전에 나온 대로 염불과 좌선으로 길들이는 것이 좋겠다. 가끔 너무나 큰 경계가 와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을 때엔 운동이나, 절 수행도 추천한다.

몸을 가지고 있기에 일어나는 오욕칠정을 인정하며, 더 행복하고 더 아름다운 삶을 위해 수행이 필요하다. 그동안 참고 인내하는 수행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재미있고 즐거운 수행을 하자. 머리로만이 아닌 지금 이 순간 몸을 움직이자. 그것이 부처를 향한 첫걸음이며, 대자유의 첫걸음이다.

<김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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