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 이끄는 주인공은 '나'
고락 원인을 나에게 찾을 때
병고, 긍정적 수용 가능해져

▲ 김복인 교무
존재하는 유는 무로의 변화를 거치기 마련이며, 그중의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또한 죽음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과정을 겪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죽음과 사후의 세계를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죽음을 맞이하는 데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본다.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는 불교적 관점인 윤회관과 태어남이란 시작에서 천당 또는 지옥이라는 죽음의 종착역에 이른다는 직선적 생사관의 차이로 인하여 병마를 동반하며 지내야만 하는 노년기의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엔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아름다운 미시간 호숫가에 그림 같은 집, 일출과 일몰의 대자연의 장관을 매일 접하며 살고 있던 현지인 친구의 어머니를 방문한 적이 있다. 자연의 경관이 참 아름다웠다. 그러나 친구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니, 그분은 당신의 괴롭고 비참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몸이 아프기 시작하니, 어떤 의욕도 나지 않고, 같은 동네의 친구들도 한 사람 한 사람 떠나가니 이젠 당신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또 친구의 어머니는 말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 가시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어서 고통스러운 삶을 마치고 천당에 가고 싶다고 했다. 경제적인 여유를 비롯하여 부족할 게 없는 노년의 삶이었지만 노화에서 비롯된 병고를 탓하며 '어서 죽고 싶다, 왜 빨리 죽지 않느냐' 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자신이 겪는 육체적 고통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어머니를 도와드리려는 딸의 어떤 노력도 어머니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친구도 무척 답답하고 고통스런 마음을 하소연할 뿐이었다.

전 세계가 겪는 추세로 미국사회에서도 고령화 현상은 역연하다. 고령화가 되어 가고 있는 미국사회 가운데 물질적 여건을 비롯하여 여러모로 풍요로운 노년기를 맞이하나 늙음과 병듦에서 유래하는 고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동격화하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불행하게 마치는 상황들을 우리는 흔히 접하게 된다.

원불교 수도원에서 말년을 보내는 원로 스승들의 삶과 비교해서 생각해보았다. 칠십이 넘고 팔십이 가까운 한 원로 스승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로 스승에게 영어가 왜 필요하냐고 여쭈어 보니, 내세엔 미국에 나서 원불교 세계교화의 일꾼이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한 준비로 영어공부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늙음과 병마를 겪으며 노년을 보내야 함은 천리의 원칙이라고 하지만 영생이라는 생사관에 바탕하여 이생에 내세를 준비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생을 정리하는 삶과 하느님의 부름따라 이생을 마치면 끝이니, 자신의 정체성을 육신의 늙음과 병고로 규정지어 이생을 매듭짓는 삶을 비교해보자면 확실히 차이가 있는 듯하다.

불교의 인과관, 생사관 그리고 천도의식이 종교적인 도그마가 아니라 삶 속에서 평범한 상식으로 보편화될 길은 없을까? 앞으로 인지가 밝아지는 세상에서는 전생사를 어제 혹은 작년의 일처럼 서로 이야기하게 되리라고 정산종사는 말했다.

누구나 겪어야 하는 노병(老病)이라는 여정에서 영생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바로 '나'다. 이생에 내가 받아온 고와 락은 누가 나에게 준 것이 아니고, 내가 원인이 되어 인연되어 만들어진 것임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내가 현재 겪고 있는 병고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이생의 마지막이 바로 다시 오는 생의 시작이라는 사실이 보편적인 가치로 통용된다면 모든 개인들은 자신의 말년을 지금보다 더욱 충실하게 순간순간의 변화를 맞이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자문해본다.

대산종사는 미국에 가면 노인교화를 중점적으로 하라고 강조했다고 전한다. 기독교 신앙으로 뿌리 내려 일생을 살아온 말년의 노인층에 불교의 생사관과 천도의식이 지극히 평범하게 이해되어 공기처럼, 물처럼 만날 수 있을까? 깨달은 부처들이 세상에 편만하고, 부처의 깨침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어 상식이 된 세상을 꿈꿔 본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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