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교수칼럼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는 모든 공식 회의와 수업 전에 반드시 입정을 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수업 전에 미리 허리를 반듯이 펴고 앉아있는 학생들을 보면 내마음도 편안해지고 대견한 생각마저 든다. 교립학교에 원불교 가풍을 조금씩 실현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종교의 배경이 각각 다른 현지인들에게 우리의 교리를 수업시간에 직접 설명해 주는 것은 너무 종교적인 일이라 생각되어 부담스러웠다.

입버릇처럼 원불교는 시대화·생활화·대중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의 원불교 교리는 시대화·생활화·대중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원을 종지로한 사은사요 삼학팔조가 대법인줄도 알고 교당이나 원불교학과 학생들에게는 설교를 곧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타 종교 현지인을 상대하다 보면 영어도 부족한데다 우리 교리 또한 통달되지 못해 언어적 도그마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맹인모상(盲人摸象)이란 〈열반경〉 법문이 있다. 옛날 어떤 임금이 대신에게 분부하여 코끼리 한마리를 가져다가 소경들에게 보이고 코끼리가 무엇과 같냐고 물었다. 소경들은 제각기 손으로 코끼리를 만져 보고 답했다.

코끼리 상아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무와 같이 생겼다고 말했고, 코끼리 귀를 만진 장님은 곡식을 고루는 키와 같다고 말했으며, 머리를 만진 장님은 큰 바위와 같다고 말했고, 코끼리 코를 만진 장님은 절구공이 같다고 말했다.

또 다리를 만진 장님은 통나무 절구와 같다고 말했고, 등을 만진 장님은 평상과 같다고 말했으며, 코끼리 배를 만진 장님은 항아리와 같다고 말했고, 꼬리를 만진 장님은 동앗줄과 같다고 주장했다.

각자가 만진 부분의 코끼리도, 코끼리가 아닌 것도 아니나 장님이 눈을 뜨지 않고서는 결코 코끼리의 온전한 모습을 말하기 힘들고 고루 인증받을 수도 없다. 문자도 문제지만 그 본의가 드러나지 않음이 더 문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끝까지 장님의 소견만으로 주장한다면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사과를 직접 먹어 봤다면 그맛을 기억할 필요가 없듯이 장님이 눈을 뜨면 시비가 사라지고 고집함 없이 한뜻을 이룬다. 모든 종교의 교의와 성인들의 뜻도 이러하리라는 지각이 생긴 후부터는 원불교의 교의를 어찌 설명하면 빠를까? 어떻게 우리의 교리들을 일러주어야 언제 어디서 누구라도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고민한다. 현지인들의 삶 속 눈높이에 맞추어 교리를 바라다 볼수록 원불교 교의가 가슴에 저며오고 영롱히 빛났다. 불성의 표현이자 대세계주의 상징인 일원상, 진정한 상생의 도리를 밝혀 세계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사은, 평등세계 건설을 위한 사요, 진정한 자유를 위한 삼학, 만사 성공을 위한 팔조가 다시 보였다. 원불교인은 다만 심불을 모시고 자유와 평화 평등의 실천가 일 뿐이었다.

누구나 지구촌이라는 말은 자주쓰지만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편리해진 환경을 이를뿐 어찌 온 우주를 한집안 삼고 일체생령을 한가족 삼으며 온세상일을 한일터 삼아 하나의 세계를 개척하는 대세계주의 대장부의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누구나 자유를 노래하지만 외세나 독재로부터 정치적 자유만을 자유로 알거나 혹 방종과 자유를 혼돈하는 사람은 많아도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한 그 참나 그 진정한 대자유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삼대력을 얻어 참자아를 회복하고 성인이 되는 법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누구나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나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자신이 피해보지 않도록 타협함이 대부분일뿐 없어서는 살수 없는 근원적 생명보전의 원리를 밝게 아는자 얼마나 되며 혹 안다 하여도 천지·부모·동포·법률의 크고 너른 덕을 어찌 다 알것이며 보은의 대요인 매사에 응용무념하고 무자력자를 보호하고 자리이타행을 하며 금지법와 권장법에 따르는 법도행을 실천하는자 몇이나 있을까!

누구나 평등을 구현하자고 외치나 각자의 관심을 따라 어느 한편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생활과 교육과 지식과 인권을 아우르는 원만한 평등법을 인류대불공으로 지향하고 그 실천으로 자력을 양성하여 의뢰생활과 남녀차별을 없애고, 지자를 본위하여 출신과 노소와 남녀와 인종의 차별을 없애며, 타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교육하며 공도자를 숭배하여 공도헌신자가 많이 나오게 하고 그 헌신자를 부모와 같이 섬기는 자 얼마나 있을까! 이는 더이상 어느 한 종교의 도그마도 아니며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를 성취하여 인격을 완성해가며 참다운 평화와 평등의 원리를 알아 세상을 정화해가야 한다. 자유와 평등 평화 이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고, 언제 어디서나 불러야 할 우리의 노래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선응용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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