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소통법

대화 통해 대중 깨우쳐

공감·경청 능력 배워야


지금은 초연결사회다. 국가와 국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이 인터넷을 통해 꼼꼼히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초연결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 뭘까?
그것은 소통이다. 그래서 예전에 IT(Information Technology)라고 불리던 정보기술이 이제는 ICT(Information Communication Technology)라고 부르고 있다. 정보에 소통(Communication)의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 대책으로 내놓는 방안이 항상 '소통'이다. 정치·외교·남북갈등·세월호·메르스 문제가 일어날 때도 그랬다. 항상 소통의 부재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라고들 얘기한다. 소통만 잘 된다면 어떤 문제도,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모든 문제의 해법이고 만능키와 같은 소통은 왜 잘 안 되는 걸까? 우리가 소통을 잘못 이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소통이 어려운 것은 소통을 너무 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통을 그냥 준비 없이 만나서 끝장 토론하면 되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소통은 우선 상대를 인정하고 만나고 대화하고 공감하고 합의하고 실행하는 구성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복잡한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원기100년, 초연결사회를 사는 원불교인이라면 인류의 생존과 발전, 원불교의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기 위하여 어떤 소통의 능력을 갖춰야 할까?

우선 소태산 대종사의 소통법을 본받아야 한다. 대종사는 항상 대화를 통해 대중을 깨우쳤다. 〈대종경〉이 대부분 문답으로 이뤄진 것도 그 연유다. 대종사는 어떤 주제에 대해 제자들에게 먼저 의견을 묻고 그다음 설명을 했다. 그리고 강론이 끝나면 "나에게 더 물어 볼 말이 없느냐?" 하며 제자들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일반 대중이 알아듣기 쉽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종사의 소통 능력은 탁월했다.

원기100년을 맞아 우리 원불교가 주력하고 있는 교화라는 것도 사실은 소통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직 원불교의 교법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교법을 알려 주고 이해시키며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 곧 소통이고 교화다.

만약 교화가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다면 그건 우리의 소통하는 방법을 재고해야 한다. 소통은 양방향 대화다. 만일 소통을 상대방이 나를 인정해 주고, 내 얘기를 들어 주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건 소통이 아니다. 내가 먼저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얘기를 들어주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줄 때 소통이 이루어진다.

소통은 결국 상대방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 그 마음은 나를 낮추고 나를 버릴 때 가능하다. 그래서 소통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쉽게 '만나서 소통 좀 하지!'라고 얘기하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셈법이 있고, 전제 조건이 있고, 마음가짐이 있다. 그것은 소통이 아니다.

원불교와 사회가, 교단과 교당이, 교무와 교도가, 교도와 교도, 교도와 비교도가 서로 양방향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초연결사회에서 원불교가 생존하고 발전해 나가는 방법이다. 이 시대 원불교 교화가 불꽃처럼 일어나기 위해서는 소통 방식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한다. 무조건 법회에 나오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보다 겸손한 자세로 상대에게 다가가 의견을 듣고, 공감하고, 수준에 맞게 실례를 들어 원불교 교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교당에 나오게 하는 것보다도 그들의 고민과 걱정과 희망에 대해 경청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고 교당에 나오고 싶게 해야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고, 우리 교단도 가족이나 친지교화에서 벗어나 더 넓게 교화망을 구축해야 한다. 원기100년, 소태산 대종사가 몸소 보여준, 눈높이 소통법이 우리에겐 절실하다.

<강남교당, CIO포럼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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