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의 삶 속에서 핀 평지조산(平地造山)의 연화(蓮花)'

소태산 대종사는 특별히 진실하고 신심 굳은 9인을 제자로 선택한 후, 정법에 바탕한 혹독한 훈련으로 인도정의의 길을 걷도록 했다.

원기2년(1917) 7월26일, 남자 수위단을 최초로 조단한 후 저축조합운동, 방언공사, 법인성사의 대역사를 일궈낼 때 9인은 주위의 냉소와 비평에 조금도 끌림 없이 일심합력으로 전진했다. 그 가운데 이산 이순순·육산 박동국·칠산 유건 선진이 함께했다. 비록 거진출진(居塵出塵)의 삶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세 분이 보여준 대신성, 대단결, 대봉공의 창립정신은 교단만대에 전해지고 있다.

▲ 이산 이순순 선진.
'재가공부길' 표준 잡은 이산 선진

인화와 용단력의 소유자인 이산 이순순(二山 李旬旬·호적명 인명·1879~1941)선진. 특유의 호방함 속에 다정함까지 겸비한 이산 선진은 대종사와 성도(成道) 이전부터 인연이 깊다.

입정삼매에 빠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노루목 낡은 집에 기거했던 대종사는 사나운 비바람이 들이쳐도 비에 젖는 줄도 몰랐다. 이산 선진은 불가사의한 기운에 이끌려 노루목을 찾게 됐고, 그 비를 다 맞으며 지붕을 고쳤다. 대종사와의 숙연이었다.

〈불법연구회 창건사〉에는 대종사 20세 되던 1910년 10월, 부친 박회경 대희사의 열반상을 기록하고 있다. 부친은 "내가 처화(어린시절 이름)의 전도 발전을 보지 못하는 것이 철천의 한이다"고 토로했다. 아들의 구도를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친의 죽음은 대종사에게 큰 충격일 뿐만 아니라 가계의 채무와 호주의 책임을 떠안게 했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이산 선진은 "그렇게 심화(心火)만 끓이고 앉았을 것이 아니라 새로 정신을 차려 어느 방면으로든지 활동을 하면 다시 살 길이 생길 것이니 장사라도 나서자"며 힘을 실었다. 대종사도 "내가 이 빚을 갚아 버려야 내 소원을 이루겠구나"하고 작정하고 칠산 유건, 사타원 이원화를 대동해 민어파시(波市)로 유명한 탈이섬으로 향했다.

해결사로 나선 이산 선진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대종사를 도왔고 대종사의 인격과 용모에 감복한 이들이 계속 생겨났다. 대종사로부터 물자를 가져가면 험난한 바다 날씨에도 만선으로 돌아오는 배들이 속속 생겨나니 '재수 좋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대종사는 석달간 벌어들인 수익으로 그간의 채무를 갚게 되었고 다시 구도에 전념할 수 있었으니, 이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이산 선진의 공덕은 지중하다.

이산 선진은 대종사 대각 후 삼산 김기천 선진의 인도로 12살 연하인 대종사의 제자가 됐다. 그는 남자 정수위단의 감방(坎方)단원으로 임명되어 허례폐지와 미신타파, 금주단연으로 저축조합 자금조성에 심혈을 다했다. 또한 방언공사시 동지들과 함께 흙짐을 져 나르며 온갖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일호의 사심 없이 난관을 돌파했다.

〈대종경〉 수행품 19장에는 대종사가 재가로 있던 이산 선진에게 직접 '외정정(外定靜) 내정정(內定靜)'의 공부길을 밝힌 법문이 수록됐다. 주산 송도성 종사가 정리한 대종사 수필법문의 일부이다. "자네는 그간 집에서 공부를 어떠한 대중으로 하여 가는가? 나의 앞에서 말하여 보라"하시니, 순순이 말하길, "저의 마음을 평화하게 하고 편안하게 함으로써 주장하옵나이다", "평화한 마음과 편안한 마음을 가지기로 하면 어찌하면 가져지느냐?" 능히 대답치 못하는 순순에게 대종사는 '동정간 정정 얻는 법'을 설했다. 이산 선진은 늘 평화로운 이상을 그려왔으며, 말년에는 동과 정 두 사이, 외정정 내정정 공부에 매진했다.
▲ 육산 박동국 선진.
묵묵함으로 효를 다한 육산 선진

"너는 나를 대신하여 모친 시탕을 정성껏 하라. 그러하면 나도 불효의 허물을 만일이라도 벗을 수 있을 것이요, 너도 이 사업에 큰 창립주가 되리라."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인도품 49장에서 모친인 유정천 대희사의 환후를 챙겨온 육산 박동국(六山 朴東局, 호적명 한석, 1897~1950)선진의 효심에 고마움을 표했다. 당시 대종사는 부안 변산 봉래정사에 머물며, 새 회상 창립기 인연을 만나고 교강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친동생인 육산 선진은 스승이요, 형님인 대종사의 뜻을 묵묵히 수행하며 모친의 시탕을 행했다. 이 또한 회상 창립의 거룩한 불사였다.

육산 선진은 대종사와 같이 기상이 늠름하고 키가 컸으며, 천성이 강직 호협했다. 원기2년 7월 대종사가 남자 정수위단원을 조직할 때 이방(離方)단원으로 법인성사의 대업을 성취하는 데 막중한 소임을 다했다.

육산 선진은 혈인기도를 마친 후에도 정신·육신·물질로 대도회상 창립에 힘껏 노력했으나 전무출신의 길을 걷지 못했다. 안타까운 역사도 있다. 6.25 한국전쟁 때 희생당한 것이다. 장남 용진이 홍농지서 차석 순사로 근무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길룡리 집으로 돌아와 숨었다. 영광지역이 빨치산들의 천하가 되자 육산 선진은 '자식을 내놓으라'는 그들의 성화에 접대와 온갖 수고를 다했지만 용진은 무참히 살해당했고, 육산 선진도 원기35년(1950) 9월21일, 54세의 일기로 최후를 맞게 됐다.

정산종사는 육산 선진의 막내아들 용만을 불러 위로와 교훈을 준 후 그가 간 뒤 "나는 대종사님 친척은 내 친척 같은 생각이 나더라"고 말했다. 용만은 현재 익산에 거주하고 있으며, 육산 선진의 출가한 두 딸 일춘 영춘 슬하에 이증원 교무와 김현국 교무가 전무출신의 길을 걷고 있다.
▲ 칠산 유건 선진.
'지존의 스승'으로 모신 칠산 선진

소태산 대종사는 대중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칠산 유건(七山 劉巾·호적명 성국· 1880~1963)선진에게 "저분은 나의 외숙인데도 나를 이처럼 공경한다. 내가 미안해서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해도 항상 저렇게 한다"고 하니 칠산 선진은 "이 생의 육신 인연으로는 내가 비록 대종사님의 외삼촌이지만, 영생을 통해 놓고 보면 대종사님은 나의 영원한 스승님이요, 나는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스승을 대할 때에는 항상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칠산 유건은 그렇게 대종사를 지존의 스승으로 모셨다.

〈원광〉 42호 '칠산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 칠산 선진의 투철한 신성을 읽을 수 있다. 칠산 선진은 대종사의 외모에 대해 "어디가도 드러난 인물이었다. 도통 하신 뒤에는 얼굴이 탁 티어 누가 보아도 범인이 아님을 알아볼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또한 "통감을 약간 배운 것으로 알고 있던 대종사께서 대각하신 후에는 별안간 글도 거의 모르는 것이 없게 되고, 배운 일도 없는 한시도 척척 지을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 벌써 범인은 아니라는 것을 내 무식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칠산 선진은 팔산 김광선 선진과 함께 대종사의 권유를 받아 태을교의 치성을 올리는 데 동참했다. 대종사가 함께 참여한 이들에게 당신이 '개안(開眼)했다'고 하자 대중들은 그리 믿었다.

대종사가 무질서한 모임을 경계하고 칠산과 팔산에게 진실한 사람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 때 칠산 선진도 여럿 제자를 불러 모았다고 했다.

칠산 선진의 특별한 점은 대종사를 '스승으로 모시자'고 공식 발의한 것이다. 이후부터 경어는 물론 호칭을 '당신님'으로 정해 사제지간의 의를 맺었다. 좌정하는 방식도 아랫목은 자연 대종사의 차지가 됐으며, 엄교준책이 있게 되면서 상하의 예를 세우는데 칠산 선진의 공이 컸다. 이후 조그마한 일이라도 제자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대산종사는 칠산 선진 종재식에서 "칠산선생님은 대종사님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인연이 지중하신 분이다. 성현이 회상을 여실 때에는 첫 제자를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1차 영산방언공사 때에는 주장이 되시어 활동하셨으며, 2차 방언공사 때는 당신이 재가 교도로서 노동을 하시겠다 하시므로 형산 김홍철 종사께서 '저는 팔산님의 자손으로 어찌 칠산 선생님의 일하시는 것을 뵐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여기저기 다니시며 봐 주시기만 하면 품삯을 드리겠습니다'하니 화를 내시며 '어찌 나보고 빚을 지라 하느냐'며 꼭 같이 일을 하시고는 품삯만 받으시고 교당에서는 식사도 아니 하시고 가셨다 하니 이 점이 칠산님의 장하신 점이시다"고 칭송했다.

칠산 선진은 거진출진으로 심산평야에서 32년간을 목우작농(牧牛作農)하다가 원기42년(1957) 78세때 총부 옆 중앙수양원에 이거하여 만년 수양에 힘쓰다 원기48년(1963) 2월22일 83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소태산 대종사와 구인제자들이 법인성사의 이적을 나툰 8월이다. 원기100년을 맞아 제214회 임시수위단회에서 구인선진을 종사위로 추존하고 신앙의 축을 세웠다. 이에 본지는 정산종사 외 9인 제자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1주는 일산 이재철·사산 오창건 선진, 2주는 삼산 김기천 선진, 3주는 오산 박세철·팔산 김광선 선진, 4주는 이산 이순순·육산 박동국·칠산 유건 선진을 소개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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