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타원 박사시화 대봉도

일타원 박사시화(一陀圓 朴四時華, 1867∼1946)는 교단 3대 여걸(三大女傑)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교단 초창기 대중들은 박사시화와 더불어 이타원 장적조, 삼타원 최도화 세 사람에게 삼대여걸이란 칭호를 붙여 존경했다. 이들은 비록 무산(無産), 무식(無識), 노쇠하지만 전문 순교로 교화 활동에 전심전력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일원대도 정법회상에 인도했기 때문이다.

일타원 대봉도는 남원 사람으로 일찍이 결혼했으나 자녀를 두지 못하고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 48세에 서울로 와서 익숙한 바느질 솜씨를 가진 지라 도정궁(都正宮) 노대부인의 수양딸이 되고, 그의 영향으로 불연(佛緣)이 깊어졌다.

57세인 원기 8년(1923) 9월경 구례 화엄사 화주(化主)가 되어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전주에서 삼타원 최도화를 만나 소태산 대종사에 관한 소식을 듣고 한번 뵙기를 원했다. 원기 9년 2월 29일, 최도화의 안내로 정산종사, 추산 서중안, 혜산 전음광을 대동하고 소태산 대종사가 처음으로 경성(서울)에 가셨을 때, 태평여관에서 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되고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이튿날에는 여동생 박공명선의 딸인 성성원의 집(계동 100번지)으로 대종사를 안내하여 며칠을 머무시는 동안 박공명선을 입문시켰다. 이어 3월에는 추산 서중안이 마련한 당주동 한옥에서 한 달 동안 대종사를 시봉하면서, 육타원 이동진화, 구타원 이공주 등을 차례로 인도하여 서울교화의 문을 열었다.

원기 9년 5월 만덕산에서 한 달간 선(禪)을 날 때에 대종사를 곁에서 시봉했으며, 익산총부 건설 당시에도 힘닿은대로 살림에 조력했다. 서울 등지를 오가며 떨어진 양말, 헌 양복, 명태 등을 모아다가 초창 당시의 간난한 살림을 알뜰히 보살폈다. 그러는 중에도 총부 동하선에는 선비를 준비해서 반드시 입선했다.

총부에서 선을 날 때에는 대중들의 흙 묻은 신발 깨끗이 씻어 주기, 떨어진 고리짝 예쁘게 발라주기, 새 회우(會友)의 세숫물 떠다주기, 더러워진 옷 빨아 주기, 휴지를 물에 담가 찧어서 바구니 만들어 주기, 헤어진 이불 누벼 주기 등으로 한 시도 그냥 있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여 총부 대중들을 친자녀처럼 챙겼다. 괴로움도 체면도 잊은 채 알뜰한 자비심과 보살행으로 총부 대중에게 인정과 고마움을 심어주었다.

대종사의 건강을 염려, 일타원 대봉도가 제안한 '종법원 회객시간(會客時間) 제정의 건'(월말통신 23호 수록)을 보면 그 신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제안은 바로 채택되어 긴급사항이 아닐 경우 대종사를 뵙는 시간을 오전 9시∼11시로 결정 시행하게 되었다.

일타원 대봉도는 서울, 광주, 남원 등지를 다니며 교직없는 전문 순교로 교화 활동을 펼쳐 창립 제1대내에 무려 5백 75명을 입문시켜 최다연원자가 되었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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