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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을 통해서 본 삶과 죽음에 대한 담론 / 일감스님
금강경을 통해서 본 삶과 죽음에 대한 담론 / 일감스님
  • 이성심 기자
  • 승인 2015.09.11
  • 호수 17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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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죽음이 아니다' 이 순간 깨어있는 삶인가
▲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일감스님.
▲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일감스님은 내비둬콘서트와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의 원조 기획자로 현재 종단의 중책을 맡아 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자해, 자살, 고독사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부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고해의 바다'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각자가 추구하는 이상 앞에서 경계로 인해 고해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아! 힘들다' 일이 안 풀려 힘들고, 육신이 아파 힘들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힘들고…. '힘들다'를 외치는 사람에게 부처는 〈금강경〉에서 어떤 법문으로 희망을 열어줬을까?
3일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에서 〈금강경을 읽는 즐거움〉의 저자 일감스님과 부처님이 설한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을 〈금강경〉에 바탕해 조명해 봤다.

-우리 모두는 고해의 바다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다 힘들어 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독일 친구가 그의 예술세계를 좋아해서 70년대 이후로 10년마다 한 번씩 한국을 방문했다.

첫 방문 때는 한국이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나라로 보였다. 그 뒤로부터 10년 뒤에는 아주 바쁜 나라로 보였고, 또 10년 후에는 아주 가난한 나라로 보였다는 말을 했다. 사실 이때는 우리가 2만불 시대를 바라보는 아주 괜찮은 부자나라였는데도 그의 눈에는 가난한 나라로 보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주 부끄러웠다. 사실 그의 말이 맞다. 우리가 가난하다고 말했던 그때는 무슨 일이라도 하면 저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맞벌이 부부가 일을 해도 저축하기 어렵다.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가 가난하다는 말에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대체적으로 보면 잘 산다. 하지만, 정신적인 문제로 들어가 보면 가난한 것이 맞다.

삶의 가치관이 아주 혼란스러워졌다. 우리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물질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건강하지 못한 가치관이다. 물질을 위해서는 어떤 나쁜 짓도 서슴없이 실행하는 가난보다 못한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 사람을 포함한 생명을 존중하고 자비와 사랑과 나눔이 중요한 가치관이 돼야 한다.

부처는 설사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고통 받는 중생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는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괴로운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우리가 괴로운 것이라서 일체중생이 깨달을 때까지 쉼 없이 정진하고 실천하라고 했다.

-출가 이후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 어떻게 극복했나

가장 힘든 일은 어떤 것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답하는 것을 보니 아주 힘든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좀 어려운 일들은 여러 번 있었다.

어머니를 잠깐 모시고 있었는데 돌아가시니 잘 모시지 못했던 일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많이 아팠던 때도 있었다. 어려운 일이 올 때마다 해결 방법이 달랐다. 어떤 때는 그 일이 너무 괴로워서 일로부터 달아남으로써 시간이 해결해 준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견디고 참고 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는 그런 일이 힘든 일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괴로움이 괴로움이 아닌 경우도 있고,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금강경〉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단어는

3장의 끝 구절이다. '여시멸도 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 득멸도자,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如是滅度 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일체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으되, 멸도에 든 자는 한 사람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나만 나라고 생각하거나, 남을 남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일체 중생은 다 나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깨닫지 않고는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니다. 또 괴로운 사람이 있다면 내가 괴로운 것이다. 그러니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괴로움에서 벗어 나도록 노력하며 살라는 부처님 말씀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우리는 흔히 일의 취사를 놓고 볼 때 "공부하는 사람이 그러면 되겠어"하고 생각의 기준을 정해 놓게 된다. 어떤 행동과 생각, 자세일 때 '깨달음'이라 통용될까. '깨달음의 경지'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는가

어떤 일도 본래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없고 다만, 이름이 정해져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자기의 기준으로 어떤 일을 옳다고 하거나 그르다고 판단한다. 자기의 기준을 내려놓고 바라보면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다. 그래서 자기의 기준에 따라 한 쪽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맞으면 좋아하고 맞지 않으면 괴로워한다. 그래서 부처는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 자기만의 기준을 내려놓아라.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자기만의 기준을 내려놓고 사물을 바라봄으로 해서 순간순간 있는 그 자리에서 깨달아서 사는 것, 이런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들도 부지런히 노력하고 노력해서 현실 속에서 부처로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

-삶의 이면에는 죽음이, 죽음의 이면에는 삶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죽는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도 저 멀리서 죽음이라는 시간이 나를 향해 오는 것을 본다. 부처님께서도 죽음의 실체를 본 후 사유가 깊어졌다. 죽음이란 무엇이고,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방법은

죽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훗날 나이 들어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고 죽는 일을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 속에는 늘 죽음이 있다. 명예를 생명으로 여기는 사람이 명예를 손상하면 죽음이고,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가난이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한 발만 물러나 생각해보면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삶이 삶이 아니기도 하다. 어떤 각도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죽음이 죽음이 되기도 하고 죽음이 삶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를 얼마나 가치있게 사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하지만, 나중에 죽음을 맞이하는 문제도 중요한 문제이다.

우선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좋지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도 마찬가지이고, 나이들어 수명이 다해서 죽는 죽음도 마찬가지이고, 죽음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무서운 일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더 큰 통찰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너무 많이 두려워 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감사와 은혜의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더 큰 깨어남으로 나아가는 수행이 될 것이다.

-금강경의 내용에 바탕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의 마음공부는

무유정법 이유차별(無有定法 而有差別)이다. 한 가지로 정해진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잘 분별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한 형제요 자매이다. 서로서로 존중하고 도와가면서 이웃사촌처럼, 가족처럼 지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원불교 100년을 축하하며 원불교의 훌륭한 가르침들이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평화롭게 하는 일에 이바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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