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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혜관 원로교무 1 / 일평생 교화현장에서
심혜관 원로교무 1 / 일평생 교화현장에서
  • 이성심 기자
  • 승인 2015.09.18
  • 호수 17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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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대불공 34
일선에서 일하는 재미, 나무심는 재미로 살아
근검절약하려고 콩나물 죽 쑤어 먹고도 지내
▲ 심혜관 원로교무
원기37년 도양교당에서 강순만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한 곤타원 심혜관(崑陀圓 沈慧寬) 원로교무. 당시 불갑교당 교도회장이었던 강순만 교도를 따라 익산총부에 총회를 보러왔다. 처음 온 곳이지만 '나 살던 곳이었네'하는 느낌이 들었다. 익산총부 첫 방문을 하고 '여기 와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때가 원기39년이다.

부모님은 교당에 다니지는 않았다. 곤타원으로 인해 가족들이 일원가족이 됐다. 아버지는 총회 보러간 딸이 오지 않자 "이런 우세가 어딨냐"며 "원불교가 뭐하는 곳이냐"고 광주와 목포로 다니며 원불교에 대해 알아봤다. 그러다가 변중선 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원불교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딸이 공부하겠다'는 것을 이해했다.

어머니의 후원으로 동산선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처음 간 곳은 도양교당이다. 도양고등공민학교에서 근무를 했다. 지금 해룡고등학교이다. 이후 장수교당을 거쳐 좌포교당으로 가서 일만 하고 살았다. 좌포에서 설을 7번 쇠었다. 좌포에서는 청년들 데리고 일하는 재미로 살고, 농사 짓고 살았다. 집에서 돈 가져다 대 주면서 살았다. 쌀 8짝 빌려다 섰지만 갚지도 않았다. 순익 교무 어머니가 내 심정을 잘 알았다. 제일 재미나게 산 곳이 좌포다.

좌포에서 나와 동산선원에 있으니까 완도에서 오미산 선생이 교무를 요청했다. 소남훈련원 희사한 소남 선생하고 대나무 심고 밤나무가 많아 밤 주우며 재미있게 살았다.

소남 선생이 하루는 "우리 심 선생은 설교하면 자갈이 데굴데굴 굴러가듯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소남 선생은 "내가 어디 교무 선생님과 나란히 설 수 있느냐"며 꼭 단 아래에 서기도 했다. 오미산 선생님이 날 잘 봐서 하얀 저고리, 검정치마 입히고 법복을 입혀 행사에 자주 참석시켰다.

승부교당에서 7년을 근무했다. 쌀 계를 해서 100작 해 놓았다. 교당 유지답이 있어 어렵지는 않았지만 아끼려고 콩나물죽 쑤어 먹고 지냈다. 이후 문장교당으로 갔다. 문장에 근무할 때 아버지 돌아가셨다. 그러면서 당시 돈 100만원 내놓았다. 아버지 복 짓게 한다고 오빠가 찾아왔다. 장정현, 조지성 선생하고, 그 돈으로 교당을 지으라고 했다. 나는 13만원을 주고 방을 하나 구했다. 그리고 8월에 신광교당을 지었다. 신광교당을 신축할 때는 어머니가 쌀 200작을 내 놓았다. 당시 돈으로는 큰 돈이었다. 1남 5녀 중 내가 셋째 딸인데, 가족들이 남매계를 했다. 형제들이 다 먹고 살 만큼 잘 살아 그 계를 안 가져갔다. 또 내 고향이다 보니 어머니 정덕심화님이 후원을 많이 해 주었다. 그래서 교화도 아주 재미나게 했다.

당시 완도에 많이 주재했던 대산종사가 영산에 왔다. 나는 "왜 지명이 신광입니까"물었다. "새로울 신, 빛 광이다. 앞으로 좋아질라고 신광이다"는 대산종사의 말에 힘을 얻었다.

마지막 근무지는 금구교당이다. 교당에서는 어린이집 개설해 교화했다. 그곳에서도 열심히 교화했다. 생각해 보면 참 멋지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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