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이사를 했으니 일원상 봉안식과 집들이를 고민한다. 청소며 음식은 물론, 내 집에 머무는 동안 뭐하고 놀지, 뭘 얘기할지도 생각해 둬야 한다. 주인의 센스를 보여줄 멋진 그림이나 소품, 남녀노소 함께 놀 거리, 오래 기억될 작은 선물, SNS 자랑용 촬영기기까지. 머리로만 이미 집들이 수차례, 그러나 기뻐할 그 분을 떠올리면 바빠도 즐겁다.

서울에 큰 집을 짓고, 멋진 전시회도 하고, 으리으리한 곳에 잔칫상도 차리는 교단도 지금 그 분 맞이 준비에 한창이다. 더 근사한 주인이 되기 위해 공부도 하고, 덜 손 간 곳 없나 챙기며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는 머리 큰 개벽이나, 하루가 멀다하고 햇빛교당 올리러 다니는 환경연대, 그리고 누구보다도 잰걸음인 성업회를 보면 고맙고도 뿌듯하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우리를 찾아올 그 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연마하고 있는 걸까.

집들이에 올 분이 교무일 경우나 어르신일 경우, 혹은 친구나 아이들일 경우 준비는 다 다르다. 무릇 손님맞이란 그 분을 떠올려 가장 환영할 수 있는 방법이 성공의 열쇠다.'또 놀러오세요'라는 마지막 인사에 "너무 좋았어요. 진짜 또 올게요"라는 진심어린 대답을 듣는 것이 목표, 이 바쁜 세상에 내 집까지 와준 그 분의 만족이 집주인의 소망인 것이다.

집들이야 내 마음이지만 100년을 맞아 교당이나 기념대회를 찾아줄 '그 분'들은 다르다. 잠자는 교도일수도 원불교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은퇴한 어르신일 수도 코찔찔이 아이일 수도 있으며, 기혼자일 수도 미혼 혹은 비혼자일수도 있다. 외국인 교환학생이거나 결혼·노동이주민일 수도, 이웃종교인이거나 성소수자일 수도 있다. 고학력자일 수도 있지만 국민의 2.1%에 달하는 문맹일 수도 있고, 신체가 불편한 장애인일 수도 최근 급증하는 정신이 아픈 사람일 수도 있다. 세상에 이같이 다양한 이들이 많을진대, 혹시 우리는 너무 정형화된 기존 교도의 모습만을 생각하고 있진 않을까.

많이 배우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한마디로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기존 교도들의 스테레오타입이라면 무엄할까. 대학 못 간 20대나 취업 안된 30대, 결혼 안 한 40대, 돈 없는 50대, 노후대책 없는 60대 등 누구보다도 위로가 필요한 '그 분'들을 오히려 종교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다. 넓은 오지랖이나 남과 비교하는 버릇, 너무도 세속화된 우리 스스로가 '여유로운 그 분'들만을 초대하고 환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잔칫날까지 반년, 이토록 다양하고 아픈 그 분들을 떠올려 그에 맞는 환대를 준비해야 한다. 그 누구도,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 법이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