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은 장마가 올 듯 말 듯 후덥지근하고 심신은 괴롭고 개운치 않은 마음에 새기고 싶지 않은 달인 것은 지난날의 놀람이 너무 컸기 때문인가 한다.

가버린 듯 한 반 세기 넘는 그 세월들은 기억조차 피하고 싶은 것이 마음의 병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서가신 영혼들의 증인이기에 떠나지 않는 지난날에 아픔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온 것은 삶의 몸부림이었지만, 한국전쟁이란 이름이 남아있으니 많은 것들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1‧4후퇴당시 서해바다 파도 속 캄캄한 밤을 헤매며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던 그때 어린 나의 까만 두 눈은 더욱 커다랗게 빚 나고 있었을 것 같다. 그것은 삶을 위한 몸부림 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귀도 손도 발도 움직이기 힘든 상태에서 노를 젓는 아버지의 모습은 눈보라 파도 속 그 밤에 묻힌 삶의 몸부림이었고, 여섯 식구 생존의 희망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는데. 그 상황에서 나는 어깨와 등에 두발의 총탄을 맞게 되었다.

출혈은 얼어붙고 지혈조차 못 시킨 채 그 겨울을 섬에서 전전하며 보내야 했기에 나의 사경을 지켜보셔야 했던 부모님의 못 메인 울부짖음의 아픔은 지금도 내 가슴을 메이게 한다. 어린나이에 부상을 입은 채 서해전의 파도를 넘으며 이승과 저승을 함께했던 그것은 남쪽 땅 이곳에서 잔뼈가 굵어 가는데 큰 공부가 되었던 것 같다.

여섯 식구 모두 생존할 수 있었음은 조상님의 큰 돌보심이 계시었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믿고 항상 감사하며 살았다. 잠시잠깐 머물다 가신다던 피난처는 고향이 되어 버린 듯 답답한 가슴 달램 틈 없이 남북통일 기다리지 못하시고 부모님은 열반에 드셨다.

19세 때부터 대종사님 법 만나 지금까지 6‧1대재 올리면서 마음을 위로받았다. 그 유월은 또, 찾아왔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추모정신을 올리련다. 삶에서 생활에서 일터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천지의 돌보심이요, 살같이 목숨같이 사랑하고 마음 밭이 아름다운 것은 부모 동포의 은혜라 믿지 않을 수 없다.
지나간 세월이 너무도 아까워 휘어잡고 싶은 이법 회상 만남은 많고 많은 아쉬움들이 날로 달로 더해간다. 그러나 이 공부 이 사업에 쉴 틈없이 지내고 있는 솔솔송 이사장 신선화, 궁동교당 교도회장 신홍기 내외가 있어 내 마음은 항상 흐뭇하다.

나의 동생들이기도 하지만 법동지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곳을 향해 발은 웃음을 전할 수 있는 봉공인의 마음같이 남북통일 되는 날 북녘동포들과 함께 봉공인은 아름답다 라고 뜨거운 손 마주잡고 기쁨 나눌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리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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