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하은 교무
2012년 3월31일 처음으로 불전도구를 갖추고 100일씩 10회 기도를 시작했다. 석존성탄절을 기점으로 5차례 교당 오픈 행사를 하며 현지인을 대상으로 교화활동을 시작했다.

언제까지 한국에서 손을 벌릴 수 없기에 틈틈이 경제적 자립을 위한 아르바이트도 했다. 아울러 정기적으로 주 2회 양로원 봉사도 했다. 이곳에서 어르신들에게 독일어 교전(천도품)을 읽어드리고 족욕과 산책을 도왔다. 교전을 읽어드리면 이분들이 발음 교정도 해줬다.

한편 독일인이 운영하는 쇼토칸베륵(가라데 도장)에 정식 사무원으로 취직해 일하면서 함께 운동도 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만났다. 이는 모두 현지인과 인맥을 넓히고 현지 언어를 익히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를린교당이라 불리는 건물에서 행사를 하면 거듭하면 할수록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불편의 소리를 감수해야 했다. 새벽 기도 때는 볼펜으로 목탁을 두드려야 했으며, 대낮에 기도할 때도 좌종을 치는 것과 목탁 치면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편지를 3번이나 받았다.

또한 건물 현관문을 통해 사람들이 수시로 오고가는 것도 건물 주인들이 모여서 하는 회의석상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로인해 교당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도 어렵고, 다만 가끔씩 유학생들이 조용히 다녀가곤 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을 교당으로 함께 데리고 오고 싶어도 원불교 이미지가 오히려 나빠질까 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표현을 하곤 했다. 왜냐하면 당시 교당으로 있던 건물은 베를린 동북쪽(Pankow) 10가구가 사는 5층 빌라 2층에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당에서 좌종도 목탁도 칠 수 없었고 마음의 휴식처가 되어야 할 교당에 교도가 마음 편히 드나들기 어려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인도해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애태우던 긴 여정을 통해 매각과 매입, 이사, 봉불의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4월28일 새로운 터전에서 첫 법회를 보던 날! 그날은 대각 개교절이자 원법안 교도(Andrej Romanow 법학을 공부하는 러시아계 독일인)의 입교식이 함께 있었다. 좌종을 울리며 흘렸던 감격의 눈물은 무척이나 뜨거웠으며 결코 있을 수 없다.

그 후 석존성탄절 행사엔 18명이 함께 기념식을 올렸으며 매주 독일어로 선 법회를 보고 있다. 현지(독일어) 언어 능력은 80%정도로 독일어 법회를 보기엔 다소 부족하지만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의사소통은 가능한 상태이다. 그러나 한 두 학기 독일어 공부를 더 할 것이다.

빈 황무지였던 이곳 베를린교당에 교도 18명, 그중에 12명이 독일인이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인연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처럼 베를린 교당은 누구나 언제든지 와서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휴식처가 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속 깊은 마음 공부를 하며 성불 제중을 목표로 신앙 수행을 함께하는 활불의 도량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독일 현지에서 원불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문화와 인종을 뛰어 넘어 현지 독일인들과 독일 거주 한국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원불교를 접하고 우리의 교법정신으로 낙원세계를 건설하는 주역이 되길 바라는 서원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나 여기 지금 대종사님 전법사도로 베를린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지 언어와 문화 습득, 그리고 인연 있는 교도들을 만나기 위해 늘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하며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꽃 하나 손에 들고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원불교가 이곳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자리매김 할 수 있다면 원불교의 위상은 독일은 물론 유럽교화에 거점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한 가지 꿈이 더 있다. 현지인 교무 2명을 양성해 내는 것이다. 바른 서원으로 간절이 염원하고 공들이고 또 공들이면 되어지리라.

이번 교당 매매와 봉불식을 통해 대종사님 교법대로라면 다 되어진다는 진리의 위력! 법신불 사은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나는 그것을 확신했다. 이제 자신 성업봉찬으로 진리에 보답하는 길이 나의 갈 길이다.

베를린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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