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상 교무 '일원상'장 연구
일원상 봉안에서 〈불교정전〉

원불교사상연구원 추계학술대회에서 '일원상'장 성립사를 주제로 발표한 조덕상 교무(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박사과정)가 가장 주목을 받았다.

조 교무는 "원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교조 소태산은 이를 일원상(○)으로 형상화하여 신앙과 수행의 모든 교리체계를 완성시켰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소태산의 근본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정전〉에 '일원상'장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야 한다고 전제했다.

그는 '일원상'장 성립과정을 네 단계로 나눴다. ▷총부 대각전에서 '일원상'을 공식적으로 봉안한 1935년 ▷〈회보〉 49호에 '심불일원상내역급서원문'이 첫 등장한 1938년 ▷'일원상 법어'가 등장한 1941년 ▷〈불교정전〉 발간으로 '일원상'장의 체계가 완성된 1943년이다.

1단계인 '일원상 봉안'에 대해 그는 "1935년 대각전을 준공하며 일원상을 첫 봉안했는데 이는 소태산이 대각 후 약 20년이 지난 때였다"며 "소태산이 일찍이 자신의 깨달음을 형상화('○')했지만 이를 '일원상'이라고 명명하기까지 오랜 고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때의 일원상은 신앙적 측면에 머물러 있었다"고 짚었다.

'일원상 봉안' 이후 소태산은 본격적으로 일원상을 언급했다. 그는 "소태산은 1937년 10월 〈회보〉제38호에 '일원상에 대하여'라는 글을 내며 일원상을 신앙·숭배하고 체 받아(수행) 이용하는 법을 총체적으로 다뤘다"며 이를 2단계라고 말했다.

소태산은 이때부터 일원상에 바탕한 신앙과 수행을 수차례 강조하고 1938년 11월 '일원상'장의 핵심 법문인 '심불일원상내역급서원문'을 발표(〈회보〉 제49호)했다. 그는 "제목 옆에 친제(親製)라는 표현을 넣을 정도로 그 뜻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때를 '서원문' 단일체계로 정의했다.

하지만 1941년 2월 말, 제31회 겨울정기훈련에서 소태산은 '일원상 법어'를 설법하며 서원문과 법어의 2체계로 발전시켰다. 그는 이때를 3단계로 보았다.

그는 "이후 '일원상'장의 체계가 모두 완성된 〈불교정전〉 발간 전까지 2체계가 이어졌지만, 일원상 법어는 크게 조명 받지 못했다"며 그 이유는 학술적 논의가 부족해서라고 진단했다.

그는 3단계에서 일원상 법어가 나오게 된 의의에 대해 "서원문은 일원상의 진리·신앙·수행을 총체적으로 다뤘다면, 법어는 일원상의 깨침과 행동의 표준을 담아낸 것이다"고 주장했다.

4단계 '일원상'장이 완성된 1943년은 〈불교정전〉의 편찬이 이뤄진 시기다. 그는 "소태산은 〈불교정전〉에 와서야 '일원상'장에 일원상의 진리·신앙·수행을 밝혔다"며 그 이유에 대해 "일원상 서원문을 좀 더 세분화하여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연구발표를 통해 "소태산은 대각 후 바로 일원상을 내세우지 않고 오랜 준비기를 통해 체계화 작업을 이뤘다"며 "1935년 대각전에 일원상을 봉안한 이후부터 1943년 〈불교정전〉에 '일원상'장이 완성되기까지 8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에 대해 그는 "진리적 종교의 선언이며, 깨달음의 보편화이며, 대승정신의 계승이다"고 말했다.

소태산의 '일원상'장은 불교만의 개혁이 아닌 모든 성자의 가르침을 회통하는 큰 수레로서의 '일원상'이라는 그의 주장은 앞으로 다양한 연구를 통해 밝혀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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