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산 송벽조 선진

일본 천황 불경죄로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1년간 옥고를 치루고 나온 구산 송벽조 교무는 일경의 감시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실무에 바로 복귀하지 못하고 고향 성주로 가서 지냈다.

이에 작은 아들 송도성은 부친께 편지를 보낸다. 고향 성주와 가족이 있는 영광이 풍토가 같다며 영산으로 오셔서 가족과 함께 지내시길 청한다. 구산은 그후 삼례지부 지금의 수계농원 교무로 2년간 봉직하고 이어 금산지부 지금의 원평교당 교무로 4년을 근무한 후 연로하여 가족이 있는 익산 총부로 돌아왔다.

해방 전해 그러니까 1944년 6월 죽마고우이자 동문인 앙산 송홍눌(유학자, 필자의 증조부)이 세상을 떠나자. 삼례교무로 있으면서 조문의 글을 지었다. 한문으로 된 글의 일부를 해석해보자. "그대는 언제나 말씨와 몸가짐을 조심하고 수행을 게을리 아니하면서 날로 새롭게 탐구했네. 기상은 난초와 향풀처럼 그대 있는 자리는 따뜻하고 어진 분위기였으며, 모습은 먼지를 떨고 나온 구슬처럼 온화하고 단정하였어라… 우리가 젊었을 땐 마음을 활짝 열고 서로 애호하였더니 늙어 고향을 떠나 호남에 떨어져 사노라니 어느새 흰머리만 남았구나. 이제 동쪽 하늘(고향)을 우러러도 그대 볼 수 없으니 어두운 방에 앉아 울음을 터뜨리네. 재 너머 걸린 새벽 달이 쓸쓸한 이 내 가슴을 비추네" 구산의 고향과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글이다.

구산 송벽조는 76세의 고령(1951년 당시로는)에 중앙총부 경내에 있는 주산 송도성의 집에서 노환으로 열반에 들었다. 큰 아들인 정산종법사는 임종 무렵, '서원성불제중 귀의청정일념하시라'는 말씀을 올린다.

구산의 영(靈)은 고향을 향한다. 송벽조는 정산이 종법사가 되고나서 고향을 한번 다녀오자는 말씀을 아들에게 했으나 교중에 어려운 일이 많아 정산종법사가 부친의 말씀을 받들지를 못했다. 정산은 제1대 성업봉찬대회를 열흘 앞두고 중풍에 걸려 대회장에도 나가지 못하게 된다. 정산종법사, 시자인 이공전에게 말씀한다. "공전아 공전아 내가 낫기만 하면 고향에 한번 가자. 돌아가신 아버님이 꿈에 자꾸 보인다." 어느 날 측근에게 이런 말씀을 한다. "아버님께서 고향을 그리워 하시더니 고향 가서 나셨다. 그러나 장성(長成)을 하면 우리 회상으로 돌아와서 전무출신을 하게 되리라."

세월이 흘렀다. 필자가 19살에 경북고를 졸업하고 출가해서 영산선원에서 2년간 간사 근무를 했다. 영산으로 가기전에 대산종법사를 뵈었는데, 필자의 생년월일을 묻고 잠시 입정에 들었다. 초행길인 영산성지 곳곳이 익히 아는 곳이었다.

항타원 이경순 당시 부산교구장이 필자의 출가 소식을 듣고, 정산종법사의 말씀을 상기했는지 반가운 편지를 보내왔다. 성주 야성송씨 가문에서 전무출신을 나와 40년 세월이 지났다. 삼세 인연을 새삼 절감하며 남은 생애에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이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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