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어제서야 그간 미뤄왔던 방 청소를 말끔하게 끝냈습니다. 1시간이면 될 일을 차일피일 미루다 마음만 무거웠죠. 일 하는 시간은 '해야 하는데…' 하며 끄는 시간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그렇죠. 필요하다 느낄 때, 그 마음 하나로 몸을 움직여 실천하면 될 일을 우리는 얼마나 '해야 하는데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며' 머리 복잡하게 지내는지 모릅니다. 해야한다고 느낄 때 바로 바로 실행해서 처리해버리면, 우리 삶이 얼마나 단순하고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농사를 지으며 배우는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 농사는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어디 농사뿐이겠어요? 우리 삶은 나 혼자의 힘으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직간접적으로 얽혀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 상황들이 함께하는 만들어내는 작품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 훨씬 미미한 일일 수도 있죠.

한 알의 씨앗이 밭에 심어져서 한 포기의 완숙한 채소로 자라는 일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실제 제가 하는 일은 씨앗을 구해서 밭에 심고 가끔 물을 주는 일 밖에 없죠. 나머지는 하늘과 땅이 알아서 키웁니다. 적당한 햇살과 바람, 비와 이슬, 땅 속의 영양분과 생명력이 힘을 합해서 한 알의 씨앗이 한 포기 채소로 자라도록 최선을 다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 심어지지 않는 씨앗을 어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최소한 씨앗을 밭에 심는 실천은 우리의 몫인 거죠. 아무리 생명력 가득한 씨앗을 가지고 있더라도 때맞춰 땅에 심는 실행이 없다면, 초록의 싱싱한 야채는 없다 이겁니다.

어떻게 보면, 실질적인 우리의 작은 실천에 비하면 그 돌아오는 결과는 엄청난 것이죠.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사은 덕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심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되죠. 거름이 풍부한 밭에는 야채도 잘 자라지만 잡초도 무성해지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실천을 하느냐에 따라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능숙한 농부가 때 맞춰 잡초를 제거하고 야채를 심고 가꾸듯, 행복을 꿈꾸는 공부인은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과 마음을 사용할 때마다 인 것은 하고 아닌 것은 안하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류가 선이 좋은 줄은 알되 선을 행하지 못하며, 악이 그른 줄은 알되 악을 끊지 못하여 평탄한 낙원을 버리고 험악한 고해로 들어가는 까닭은 그 무엇인가. 그것은 일에 당하여 시비를 몰라서 실행이 없거나, 설사 시비는 안다 할지라도 불 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리거나 하여 악은 버리고 선은 취하는 실행이 없는 까닭이니, 우리는 정의어든 기어이 취하고 불의어든 기어이 버리는 실행 공부를 하여, 싫어하는 고해는 피하고 바라는 낙원을 맞아 오자는 것이니라(〈정전〉 작업취사의 목적)"

악(惡)은 버리고 선(善)은 취하는 실행만이 우리를 보다 나은 내일로 이끌어줄 수 있습니다. 막연한 기대나 바람 만으로는 그 길에 들어설 수 없죠.

인 것과 아닌 것을 잘 판단하여 인 것은 하기 싫어도 실천하고, 아닌 것은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과감히 뿌리쳐야 합니다. 생각만이 아니라, 몸과 입과 마음으로 실질적인 실천을 해야죠. 개과천선, 잘못된 것을 고쳐서 업장을 소멸하고 널리 선을 실천하여 공덕을 쌓아가는 이 일이 모든 종교의 핵심이자 행복을 부르는 습관 아닐까요?

밴쿠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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