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산 송규 종사

정산종법사는 원광대학교를 설립하고, 대종사 성탑과 성비를 건립, 친히 스승의 비문을 지었다. 〈대종경〉 편수를 친감하며, 1960년 회갑을 기념하여 전무출신 요양재단인 법은재단을 설립했다.

정산종사 회갑날 아침이었다. 생신상을 올리니, 둘러보시고 약주가 없냐고 하신다. 시자 이공전이 창황중에 벽장을 뒤져 인삼 담근 것을 겨우 찾아 정중히 한 잔을 올리니 파안대소 하시며 수저를 드셨다. 참으로 부처님의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정산종법사, 원기 46년 4월에 대세계주의인 삼동윤리(三同倫理)를 발표했다. 삼동윤리는 동원도리(同源道理) 동기연계(同氣連契) 동척사업(同拓事業)으로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는 내용으로 정산종사의 전법게송이다.

정산종사 말씀하신다. "이 삼동윤리는 앞으로 세계 인류가 크게 화합할 세 가지 대동(大同)의 관계를 밝힌 원리이니, 장차 우리 인류가 모든 편견과 편착의 울 안에서 벗어나 한 큰 집안과 한 큰 권속과 한 큰 살림을 이루고, 평화 안락한 하나의 세계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즐길 기본 강령이다."

정산종법사, 삼동윤리 법문을 공식 발표하기 몇 해전부터 말씀을 해 왔는데, 1959년 전국 학생대회 때 삼동윤리 법문의 요지를 설했다. 송천은 교무가 필자에게 이런 증언을 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총부에서 근무할 때인데, 대각전에서 나오다가 미륵산 쪽에서 세갈래 선홍색 띠가 총쏘듯이 서기방광(瑞氣放光)하는 것을 목도하고, 아우인 송수은에게 오늘 종법실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학생들에게 삼동윤리 법문을 설했다는 것이 아닌가.

원불교 회상 창립기, 간고한 생활을 솔선수범하며 살았던 인자(仁慈)와 화열(和悅)의 성자인 정산 송규 종법사는 일제 치하와 6.25전쟁을 겪으며 교단을 지키고 가꾸느라 그 몸이 지칠대로 지치었다. 병고를 얻어 9년이란 긴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교단의 최고 영적 정신적 지도자로 그 책무 수행에 혈심혈성을 다했다. 정산종사의 삶은 너무나 평범하고 소탈했다. 지극히 겸양하면서도 대범한 성품이었다.

열반 3일전 대중을 모아 삼동윤리를 거듭 설하고, 눈물을 흘리며 영모전을 건립하지 못하고 노모(준타원 이운외)를 두고 떠나는 불효를 말씀하며 목욕을 시켜달라 하시고 후계자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한 채 원기 47년(1962) 1월 24일 오전 9시 30분 겨연히 열반에 들었다.

원광대 국문과 박항식 교수가 조가를 지었다. 먼 산이 눈을 덮고 악악 울던 그 날에도 임 곧 계시오면 화기춘풍 감돌았사온데 동원도리 설하시고 우리들을 뒤에 두고 가시다니 법사님이 마음공부 잘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되라 그 말씀을 받들어서 일원대도 빛내오리.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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