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 교수의 현대건축이야기

▲ 조한 교수 / 홍익대학교 건축학부
▲ 가희동성당은 고즈넉한 마당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 평면 한옥으로 지어졌다.
지하철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북촌 한옥마을 쪽으로 걸어 올라가다 보면 왼편에 가회동성당이 있다. 하지만 길가에서 보이는 성당은 아담한 한옥뿐이다. 궁금해 하며 한옥 옆으로 들어가면 그제야 뒤쪽으로 성당 본 건물이 보인다. 고즈넉한 마당을 사이에 두고 'ㄱ'자 형 평면의 한옥과 하얀색 화강암의 성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사실 한옥도 성당의 일부이다. 한옥의 대청마루에 앉으면 북촌의 온갖 소리가 다 들린다. 한여름에는 바람도 시원하다. 마치 옛 동네 어귀의 정자 같다. 종종 순례자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이 마루에 모여앉아 쉬어가곤 한다.

가회동성당의 건축주이자 주임신부인 송차선 신부는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조선의 선비와 벽안의 외국인 사제가 나란히 어깨동무하는 모습을 담은 성당을 원했다"고 한다. 건축가 우대성은 다양한 '마당'을 활용하여, 한옥과 현대적인 건물의 조합을 절묘하게 풀어낸다.

성당 본 건물과 한옥이 마주한 '안마당'에서, 담장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강당과 연결된 '아랫마당'이 있고, 앞쪽의 널찍한 계단을 오르면 사제관과 성당 사이의 '성지마당'에 도달하게 된다.

가회동성당은 마치 북촌의 골목길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계단을 올라 '성지마당'에 오르면, 하얀 벽과 기와지붕이 액자를 만들어내고, 그 사이로 가회동의 또 다른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시간여행 하듯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면, 드디어 성전에 들어서게 된다. 검붉은 목재가 수직으로 촘촘하게 벽을 채우고 있고, 앞에는 하얀 대리석 벽에 십자가 하나만 있다. 제대와 의자도 검박하기만 하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네모난 공간은, 위에서 은은하게 스며드는 빛만으로도 신성하다.

가회동성당은 한국천주교의 본당이라 할 수 있다. 첫 미사가 봉헌된 곳은 바로 가회동 지역이다. 17세기 중국을 통해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저술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천주실의(天主實義)>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 등 실학자들 중심으로 천주학 공부가 유행처럼 번지게 되는데, 점차 학문적 호기심은 신앙심으로 옮겨가게 된다. 하지만 당시 미사를 집전할 신부가 국내에 없었기 때문에 중국 북경에 있는 주교에 신부를 요청하게 되고, 관의 감시를 피해 몰래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 주관으로 1795년 4월 5일 부활절 최인길(崔仁吉, 1765-1795)의 집에서 최초의 미사를 봉헌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회동성당의 한옥은 최초의 미사를 봉헌했던 한옥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성당 1층 역사전시실에는 1800년대 <천주실의> 원본과 함께, 왕이 천주교의 폐해를 막자며 국민에게 내린 교지인 <척사윤음(斥邪綸音,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기해일기(己亥日記)>, 로마에 소장돼 있는 원본의 영인본인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1801년)> 등 당시 천주교박해의 급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회동성당의 마지막 '마당'은 옥상에 있다. 승강기를 타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면, 마치 극장의 커튼이 열리듯이 북촌과 그 너머 서울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북촌의 골목길을 닮은 이곳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만나게 된다. 굳이 거창하게 종교의 의미를 묻지 않더라도, 가회동성당은 종교 시설이 어떻게 도시에 존재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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