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서 저술로 읽는 교사〉

〈산중풍경(山中風景)〉은 훈산 이춘풍(薰山 李春風, 1876-1930)정사의 유고(遺稿) 문집이다. 봉래제법(蓬萊制法) 곧 소태산 대종사의 봉래산 주석기(1919-1924)의 상황을 담고 있어서 교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훈산은 경북 금릉, 현재의 김천에서 태어났다. 송벽조(久山宋碧照, 1876-1951) 대희사가 고모부이니 정산종사와 내외종간이다. 유학자로, 신흥 불가(佛家)를 찾아 고향을 떠난 고모부를 설득하러 원기6년(1921) 전라도로 향했다.

송벽조의 안내로 봉래정사를 찾았다가 대종사를 뵙고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됐고, 그 해 겨울 가솔을 거느리고 이사를 단행하여 부안군 보안면 신복리 종곡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성지(영광)에서 봉래정사에 이르는 길초로, 대종사를 보필 시봉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에 인연하여 봉래산인(蓬萊山人)이라는 아호를 사용한다. 봉래산은 지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변산(邊山)이며, 사찰에서는 능가산(楞伽山)이라 부른다. 그리고 지리산과 한라산이 각각 방장산·영주산으로 불리는 바에 착안한 식자들이 이를 봉래산이라 불러 전라도 내에 삼신산을 위치토록 한 것이다.

교단에서 교리강령(敎理綱領)을 마련한 당시를 대종사 10상의 '봉래제법상'으로 그리고 있으니, 책 이름 또한 그러하다.

이 〈산중풍경〉은 국한문을 혼용한 수고(手稿)본 단권으로, 원고지 150장 분량이다. 내용에 대부분 연대가 나타나 있는데, 원기8년(1923)부터 원기12년(1927)까지이며, 이해 말에 편집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종류로 보면, 가사 5편, 한시 1편, 감각감상 10편, 처리안 2편, 서간문 13편, 논설 3편, 예문 4편이다. 원기12년에 대종사께 올린 서간문 2건을 비롯하여, 대종사 법문의 배경을 이루는 실상사 주지 한만허(韓萬虛) 및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와 관련된 글, 구인선진의 한 분인 박세철(五山朴世喆, 1879-1926)종사 및 익산총부 건설과 관련된 서동풍(春山徐東風, 1868-1925)정사의 열반기념문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가운데 주목을 끄는 것은 대종사 대각을 통한 일원상(○) 상징과 관련하여 원기8년에 기록한 '대원도후설(大圓圖後說)'이다. 곧 "오직 우리 대성사(大聖師)는 천상천하 독존(獨尊)으로 유불선(儒佛仙)을 의심하사 대각본체(大覺本體) 하신후에 대원(大圓)을 말씀하시고, …(경전들은) 곧 불지형체(佛之形體)와 선지조화(仙之造化)와 유지범절(儒之凡節)을 밝힌자라 이 유불선을 합하여 쓰는자는 곧 대원을 알고쓰는 사람이요 도가에 적손(嫡孫)이 되나니라 하시니"라 하였다.

원기20년(1935) 중앙총부에 대각전을 건축하면서 일원상 종지의 체제가 갖추어지니, 이는 교단사적으로 주목할 증언인 셈이다.

오늘날 '대종사'라는 표현은 초창기의 '종사주(宗師主)'에서 왔으니 훈산의 의견안에 의한 것이며, 출가 교도인 전무출신을 '교무'로 통칭한 것도 그러하다. 〈대종경〉의 그에 인연한 여러 법문이 전한다. 여식인 이경순(恒陀圓 李敬順, 1915-1979)종사·정화(達陀圓 李正和, 1918-1984) 대봉도와 손주 경옥·도전·도중 교무, 외손자인 이성택 교무 등 기라성 같은 후예를 배출시키고 있으니, 그 후영(後榮)이 아닐 수 없다.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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